고독한 산책, 생각의 조각들

92025년 08월 06일4

괴델의 논문은 길을 제시했지만, 동시에 거대한 벽이었다. 그 벽을 넘기 위해선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다. 튜링은 며칠 동안이나 책상에 앉아 끙끙댔지만, 생각은 맴돌기만 할 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펜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섰다. 갑갑한 실내 공기를 벗어나 케임브리지의 차가운 강바람을 쐬고 싶었다. 그의 발걸음은 늘 그렇듯 그랜트체스터 초원을 향했다.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그는 의식적으로 힐베르트와 괴델을 머리에서 지워냈다. 너무 거대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땅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갔다.

‘사람은 어떻게 계산을 하는가?’

수학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이, 연필과 네모칸이 그려진 종이를 앞에 두고 긴 나눗셈을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튜링은 그 사람의 행동을 최대한 잘게 쪼개기 시작했다. 마치 기계를 분해하는 엔지니어처럼.

첫째, 그는 종이 위의 특정 네모칸에 적힌 기호(숫자)를 ‘읽는다’. 그의 시야는 한 번에 하나의 칸에만 집중된다.

둘째, 그의 머릿속에는 현재 계산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있다. ‘이제 나누고, 다음은 빼고, 그 다음엔 다음 자릿수를 내려야지.’ 이것을 그의 ‘마음 상태(state of mind)’라고 부를 수 있겠다.

셋째, 그가 읽은 기호와 그의 현재 ‘마음 상태’에 따라, 다음 행동이 결정된다. 이것은 그가 학교에서 배운, 완전히 기계적인 ‘규칙’에 따른다. ‘상태가 ‘빼기’이고, 7을 읽었다면, 아래에 있는 4를 빼서 3이라고 쓴다.’

넷째, 그는 연필로 칸의 기호를 지우거나 새로운 기호를 ‘쓴다’.

다섯째, 그는 다음 계산을 위해 시선을 다른 칸으로 ‘이동’시킨다. 보통은 바로 옆 칸이다.

튜링은 걸음을 멈춰 섰다.
강물 위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머릿속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닐까?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계산이라도, 결국에는 이 극도로 단순한 행동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1. 기호를 읽는다.
  2. 자신의 ‘상태’에 따라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3. 기호를 쓴다.
  4. 다른 칸으로 이동한다.
  5. 자신의 ‘상태’를 바꾼다.

이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었다. 모호한 ‘확실한 방법’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구체적인 행동의 목록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생각의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졌다.

인간 계산기를 대체할 상상 속의 기계를 만들어보자.

그 기계는 무한히 긴 ‘종이테이프’를 가질 것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네모칸 종이처럼.
그 기계는 테이프 위를 오가며 한 번에 한 칸의 기호만 읽고 쓸 수 있는 ‘헤드(Head)’를 가질 것이다. 인간의 시선과 연필처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 기계는 인간의 ‘마음 상태’처럼, 유한한 개수의 내부 ‘상태(State)’를 가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기계는 ‘규칙표(instruction table)’를 가질 것이다.
“만약 현재 상태가 S1이고 헤드가 기호 X를 읽는다면, 기호 Y를 쓰고, 오른쪽으로 한 칸 이동한 뒤, 상태를 S2로 변경하라.”
이런 식의 아주 단순한 명령들의 집합.

이것이다!
이 단순한 장치만으로 세상의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덧셈, 뺄셈은 물론이고, 미분방정식을 푸는 것, 소수를 찾는 것까지도. 시간은 오래 걸릴지언정, 원리적으로는 가능해야 했다.

튜링은 마침내 ‘계산’이라는 행위를 정의할 구체적인 모델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더 이상 모호한 개념이 아니었다. 테이프와 헤드, 그리고 상태로 이루어진,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한 기계였다.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시작된 고독한 산책은, 인류의 지성사를 바꿀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의 탄생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숙사 방으로 달려가, 종이 위에 그 상상 속의 기계에 대한 첫 번째 스케치를 시작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