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The Dawn)

1002025년 09월 21일4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
드미트리는 더 이상 코드의 최전선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구글의 수석 엔지니어이자, 웹 플랫폼 아키텍처 그룹의 의장으로서, 기술의 숲 전체를 조망하고 다음 세대의 나무를 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키보드 대신, 미래의 로드맵이 담긴 태블릿이 더 자주 들려 있었다.

어느 맑은 가을날 오후, 그는 자신의 딸과 함께 동네 공원을 찾았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딸아이는 서툰 걸음으로 잔디밭을 가로지르다, 이내 아빠의 품에 안겨들었다. 드미트리는 딸을 안고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요즘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는 한 ‘경험(Experience)’에 접속했다.
그것은 웹사이트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생경했다.

“고대 로마 재건 프로젝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화면에는 고고학적 고증을 거쳐 완벽하게 복원된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이 나타났다. 스마트폰을 움직이자, 자이로스코프 센서와 연동된 화면이 마치 창문처럼, 그의 눈앞에 펼쳐진 공원 풍경 위로 로마의 전경을 겹쳐 보여주었다. 증강현실(AR)이었다.

그는 화면의 특정 건물을 터치했다.
“판테온. 모든 신을 위한 신전입니다. 내부를 둘러보시겠습니까?”

그가 ‘예’를 누르자, 화면은 순식간에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가상현실(VR) 모드로 전환되었다. 그는 이제 공원 벤치가 아닌, 판테온의 장엄한 돔 아래에 서 있었다. 천장의 구멍(오쿨루스)으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바닥의 대리석에 부딪혀 흩어지는 모습이 눈부시게 사실적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앱 설치도 없이, 브라우저 안에서, 끊김 없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경험의 이면에서, 자신이 관여했던 모든 기술들이 하나의 교향곡처럼 연주되고 있음을 느꼈다.

  • 수백만 개의 폴리곤으로 이루어진 로마 시내를 효율적으로 렌더링하는 메시 셰이더.
  • 판테온의 돔에서 쏟아지는 빛의 사실적인 반사를 계산하는, 레이 트레이싱 확장 기능의 초기 프로토타입.
  • AR과 VR 모드 사이를 매끄럽게 전환하며, 머리의 움직임을 지연 없이 따라오는 WebXR과의 깊은 통합.
  • 수많은 관광객 NPC들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WebAssembly 기반의 AI 로직.
  • 이 모든 것을 구동하면서도 스마트폰의 배터리를 아끼는, 이기종 컴퓨팅과 전력 관리 API.

그는 문득, 이 프로젝트를 만든 개발팀의 블로그 글을 떠올렸다.
“저희는 건축가와 역사학자, 그리고 게임 개발자로 이루어진 작은 팀입니다. WebGPU와 같은 개방형 표준 기술이 없었다면, 저희 같은 작은 팀이 이런 거대한 비전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희는 더 이상 특정 플랫폼이나 값비싼 라이선스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상상력과, 웹 브라우저뿐입니다.”

바로 그때,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딸이 손가락으로 화면 속 빛나는 판테온을 가리키며, 옹알이하듯 소리를 냈다.
“아빠, 저거 뭐야?”

드미트리는 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맑은 눈동자 속에, 자신이 지난 10여 년간 걸어왔던 모든 여정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버벅거리는 3D 모델 앞에서 좌절하던 젊은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는 WebGL의 한계를 넘어섰고, 파편화된 하드웨어의 현실과 싸웠으며, 경쟁과 협력의 경계에서 길을 찾았다. 그는 기술의 깊이를 파고들었고, 동시에 기술의 가치를 세상에 전파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노력의 끝에서, 그는 자신의 딸에게, 그리고 미래의 모든 세대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의 프로젝트 ‘Dawn’은 이제 단순한 C++ 구현체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웹이라는 세상에 찾아온, 진정한 ‘새벽(Dawn)’ 그 자체였다.
낡고 어두웠던 시대가 저물고, 누구나 자신의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딸을 더 꼭 껴안았다.
“응, 저건 아주 오래된 집이란다. 언젠가 아빠랑 같이, 저 안을 걸어볼까?”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했다.
그의 여정은 끝났다.
하지만 그가 연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딸과, 그리고 다음 세대의 수많은 연금술사들의 손에서.

창밖으로, 실리콘밸리의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시대가 저무는 황혼인 동시에, 곧 다가올 눈부신 아침을 예고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여명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