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정상

352025년 08월 20일4

연구실의 시계는 평화롭게 흘러갔다.
드미트리의 하루는 이제 예측 가능한 루틴으로 채워졌다. 아침에는 전날 들어온 마이너 버그 리포트를 검토하고, 오후에는 Dawn의 성능을 0.1%라도 더 끌어올리기 위한 미세 조정 작업을 진행했다. 저녁에는 W3C 커뮤니티 그룹의 장기적인 로드맵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너무나도 순조로웠다.
그 평화로움 속에서, 드미트리는 언젠가부터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오후, 카이가 커피를 들고 그의 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더 이상 기술적인 문제로 드미트리를 찾지 않았다.
“드미트리, 잠시 시간 괜찮나?”
“물론이지, 카이. 무슨 일이야?”
“별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이제 WebGPU도 안정화되었고, 다음 로드맵도 정해졌으니, 자네의 다음은 뭔가? 또 다른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는 거라도 있나?”

카이의 질문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드미트리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나의 다음은?’

그는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았다. 그의 삶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었다. WebGPU를 세상에 내놓는 것. 그 명확하고 거대한 목표는 그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이유였고, 밤늦게까지 그를 책상 앞에 붙잡아 두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목표는 달성되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꿈꾸던 산악인이, 마침내 정상에 깃발을 꽂고 내려온 뒤의 허무함과도 같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다시 오를 산을 잃어버린 산악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는 카이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당분간은 WebGPU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지.”

그것은 모범적인 대답이었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말이기도 했다.

며칠 후, 그는 무심코 구글의 내부 프로젝트 목록을 검색하고 있었다.
‘차세대 분산 데이터베이스 엔진.’
‘양자 컴퓨팅을 위한 소프트웨어 스택.’
‘인공지능 신약 개발 플랫폼.’
세상을 바꿀 만한 거대하고 흥미로운 프로젝트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WebGPU만큼 절실하고,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들지 못했다.

그는 문제 해결사였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풀어야 할 거대한 문제가 없었다.

그날 저녁, 그는 머리를 식힐 겸 캠퍼스 야외 카페에 앉아 있었다. 저녁 햇살이 노트북 화면에 부서지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앳되고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봐! 내가 만든 거! 파티클 수백만 개가 터져 나오는데도 프레임 드랍이 거의 없어!”

고개를 돌리자, 갓 입사한 인턴으로 보이는 두 젊은 엔지니어가 노트북을 앞에 두고 환호하고 있었다. 한 명이 만든 작은 데모를 다른 한 명에게 자랑하는 중이었다. 화면에는 마우스 움직임에 따라 형형색색의 빛 입자들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거 뭘로 만든 거야? 대단한데?”
“WebGPU!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 이 파티클들의 다음 위치를 컴퓨트 셰이더로 한 번에 계산하고, 렌더 파이프라인으로 뿌려주기만 하면 돼. 가능성이 정말 무한한 것 같아!”

그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드미트리는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만들 것인가’만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의 다음 목표, 자신의 다음 산만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젊은 개발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WebGPU라는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쥐고,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순수한 창작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그 순간 드미트리는 깨달았다.
자신의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그의 임무는 또 다른 거대한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임무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작은 언덕과 산을 오를 수 있도록, 가장 튼튼하고 안전한 등산화와 지도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길을 잃었을 때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고, 더 높은 곳을 꿈꿀 수 있도록 새로운 등반 기술을 개발하는 것.

그는 더 이상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이 새로운 시대의 ‘관리인’이자 ‘안내자’였다.
텅 비어 있던 정상에서 내려와, 이제 막 등반을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곁에 서야 할 때였다.

드미트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개발자 포럼에 올라온 한 초보자의 질문을 클릭했다.

“WGSL에서 버퍼의 데이터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의 다음 여정은, 이 작은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