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의 일상은 이제 거대한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나는 메시 셰이더와 레이 트레이싱 같은, WebGPU의 먼 미래를 설계하는 W3C에서의 활동이었다. 다른 하나는 텐서플로우.js와 같은 핵심 파트너들이 현재의 WebGPU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 지원이었다.
그는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자신이 만든 플랫폼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그 안정적인 구도에 예상치 못한 균열을 일으킨 것은,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크로미움(Chromium) 프로젝트의 공개 코드 리뷰 시스템, ‘게릿(Gerrit)’에 올라온 한 줄의 커밋 메시지였다.
“Add initial support for Direct3D 11 backend in ANGLE.”
(ANGLE에 Direct3D 11 백엔드를 위한 초기 지원 추가)
이 커밋을 올린 사람은 마이크로소프트 소속의 엔지니어였다.
이 한 줄의 메시지는 Dawn 팀 내부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Direct3D 11이라고?”
벤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D3D11이지? WebGPU는 D3D12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ANGLE조차도 이미 D3D11을 넘어 D3D12를 지원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는 거지?”
그의 말대로였다. D3D11은 한 세대 이전의 기술이었다. 마치 최신 전기차 엔진을 개발하는 회사에서, 갑자기 구형 가솔린 엔진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처럼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그 행간에 숨겨진, 훨씬 더 깊은 전략적 의도를 읽어내고 있었다.
그는 팀원들에게 설명했다.
“이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야. 이건… 영토 확장을 위한 준비 작업이야.”
그는 윈도우 운영체제의 아키텍처 다이어그램을 그렸다.
“윈도우 7, 윈도우 8. 전 세계에는 아직도 수억 대의 구형 윈도우 PC가 존재해. 그리고 이 구형 운영체제들은 최신 기술인 Direct3D 12를 지원하지 않아. 그들이 지원하는 마지막 다이렉트X 버전이 바로 D3D11이야.”
카이가 그제야 의도를 파악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ANGLE이 D3D11을 다시 지원하게 만들어서, 구형 윈도우 PC에서도 크롬 브라우저가 WebGL을 원활하게 돌릴 수 있도록 만들려는 거군요. 하지만 그게 WebGPU와 무슨 상관이 있죠?”
“바로 그게 핵심이야, 카이.”
드미트리의 눈이 빛났다.
“그들의 진짜 목표는 WebGL이 아니야. 그들의 목표는 자신들의 브라우저, ‘엣지(Edge)’야.”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엣지 브라우저는 우리와 같은 크로미움 기반이야. 즉, 우리와 똑같은 Dawn 엔진을 사용하지. 하지만 만약 마이크로소프트가 Dawn에 D3D11 백엔드를 추가하는 데 성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연구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그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엣지 브라우저는 구형 윈도우 7 PC에서도 WebGPU를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최신 기술인 WebGPU를, 10년도 더 된 낡은 운영체제 위에서 말이지. 반면 우리 크롬은 공식적으로 윈도우 7/8 지원을 중단했기 때문에, 그 시장에 진입할 수 없어. 이것은 엣지 브라우저가 크롬을 상대로 가질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차별점이 될 거야.”
이것은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공개적인 경쟁을 선포하는 대신, 크로미움이라는 공동의 오픈소스 프로젝트 안에서, 자신들의 생태계에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조용히 코드를 추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표준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이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
“이것 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거인의 싸움 방식이야.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경기장에서, 똑같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승리를 쟁취하려 하고 있어.”
이 사건은 드미트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가 상대하는 것은 더 이상 기술적 난관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무대는 이제, 각자의 생태계와 비즈니스 목표를 가진 거대 기업들이, 오픈소스라는 이름 아래 치열하게 벌이는 수 싸움과 전략의 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즉시 팀의 방향을 수정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작업을 막을 명분은 없어. 그들의 기여는 크로미움 생태계 전체에 이득이 되는 일이야.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D3D11 백엔드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역시 우리의 강점을 극대화할 다음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드미트리는 이제 단순히 기술을 선도하는 것을 넘어, 경쟁의 판도를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의 플랫폼이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전략가의 시야를 가져야만 했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커밋에 공개적으로 댓글을 남겼다.
“Welcome back, D3D11. This is an exciting development for the project. Let us know how the Dawn team can help.”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D3D11. 프로젝트에 아주 흥미로운 진전이군요. 저희 Dawn 팀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알려주십시오.)
그것은 패배 인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한 상대를 존중하고, 더 큰 판을 내다보는 진정한 승부사의 첫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