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GPU Core’라는 새로운 방향성이 확립되자, 커뮤니티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드미트리는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핵심 사양을 다듬고 생태계를 지원하는 관리자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의 삶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평온함을 되찾는 듯했다.
그 평온함 속으로, 한 통의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발신인은 레나였다. 한때 그의 팀에서 가장 젊고 총명했던 엔지니어. 이제는 Dawn의 TBR 백엔드 개발을 이끄는, 그 자신만큼이나 성장한 리더였다.
“드미트리, 당신께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다음 날, 드미트리는 회사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레나와 마주 앉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결연함과 함께, 미안함과 아쉬움이 뒤섞여 있었다.
“무슨 일이야, 레나? TBR 백엔드에 문제가 생겼나?”
드미트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문제는… 저에게 있습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회사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드미트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레나는 Dawn의 미래를 이끌어갈 가장 중요한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던 동료.
“왜… 왜 그런 결정을 한 거지? 더 나은 제안이라도 받은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레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면서, 제 인생을 바꿀 만한 것을 배웠습니다. 바로 ‘문제를 정의하는 법’을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WebGL의 한계라는 문제를 정의하고, WebGPU라는 해결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보며, 제가 정말로 풀고 싶은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제가 풀고 싶은 문제는, ‘어떻게 하면 3D 그래픽을 더 빨리 렌더링할까?’가 아닙니다. 제가 진짜로 풀고 싶은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저 같은 평범한 개발자도, 복잡한 3D 그래픽 엔진을 처음부터 쉽게 만들 수 있을까?’입니다.”
그녀는 WebGPU가 훌륭한 저수준 API이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개발자들에게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저는 모든 개발자들이, 유니티나 언리얼 같은 거대한 블랙박스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작은 렌더링 엔진을 장난감처럼 조립하고 실험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WebGPU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더 직관적이고 생산적인 도구와 라이브러리가 필요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녀는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오픈소스 3D 엔진을 만드는 스타트업을 창업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 엔진은 처음부터 Rust와 WebAssembly, 그리고 WebGPU를 기반으로, 현대적인 웹 개발의 패러다임에 맞춰 설계될 것이었다.
“당신이 WebGPU라는 단단한 땅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드미트리. 이제 저는, 그 땅 위에 누구나 쉽게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최고의 벽돌과 설계도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드미트리는 그녀의 말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정적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꺼이 황무지로 떠나는 개척자의 모습.
그는 아쉬움 대신,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자신이 키운 새가, 이제 자신의 둥지를 떠나 더 넓은 하늘로 날아가려 하고 있었다.
“훌륭한 결정이야, 레나.”
드미트리가 진심으로 말했다.
“네가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네가 옳다고 믿는 길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나아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게. 나는 언제나 너의 첫 번째 후원자가 될 테니.”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것은 이별의 악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세대의 연금술사가, 자신을 뛰어넘을 다음 세대의 연금술사에게, 축복과 함께 사명을 넘겨주는 의식과도 같았다.
레나가 떠나고, 드미트리는 혼자 카페에 남아 커피를 마셨다.
그는 문득,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이룬 가장 위대한 성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훌륭한 기술을 만드는 것을 넘어, 그 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꿈을 꾸는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것.
그의 여정은 이제, 그 자신의 손을 떠나, 레나와 같은 수많은 새로운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물러나, 그들이 펼쳐낼 눈부신 미래를, 따뜻한 미소로 지켜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