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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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6월 21일

릴리 리브스는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인간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물리적 형태를 벗어났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빛의 입자로 흩어져 ‘양자 안정화 네트워크’ 속으로 스며들던 순간, TQA 본부의 모든 시스템은 경이로운 에너지 파동으로 잠시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깊은 침묵과, 그녀의 부재가 남긴 거대한 공허함뿐이었다.

전 세계 지도자들과 과학자들은 경외와 상실감 속에서 텅 빈 관측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방금 역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목격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릴리는 승천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희생하여 시스템의 일부가 된 것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인류는 릴리의 부재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처음에는 불안과 혼란이 지배적이었다. 아키텍트의 감시는 여전했고, 언제 다시 미지의 위협이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릴리라는 절대적인 보호막이 사라진 지금, 인류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 위험한 우주를 헤쳐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 QSN은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네트워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지능적으로 작동했다. 잠재 능력자들은 더욱 정교한 시스템의 안내를 받았고, 국지적인 양자 이상 현상은 발생 초기에 자동으로 감지되어 중화되었다. 외계 문명과의 소통 채널 역시 오류 없이 관리되었으며, 코바치의 잔존 기술 연구는 엄격한 윤리적 통제 하에 조금씩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릴리의 의지가 시스템 전체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인류 문명을 조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수호자 릴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새로운 시대의 여신처럼 숭배하며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했고, 또 다른 이들은 QSN 네트워크에 융합된 그녀의 의식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그저 경외로운 전설, 밤하늘의 별처럼 멀고 아득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녀의 실제 상태에 대해서는 끝없는 추측과 이야기만이 무성했다.

“정말… 그녀가 저 시스템 안에 살아있는 걸까?” TQA 본부에서 QSN의 거대한 중앙 코어 – 끊임없이 푸른 빛을 발하며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거대한 크리스탈 구조물 – 를 바라보며 제이크 허드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릴리의 마지막 결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녀의 희생은 숭고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고독하고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우리에게 믿음을 남겼네, 제이크.” 옆에 서 있던 백발의 노과학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과거 에단의 동료 중 한 명이었다. “스스로 설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녀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리라는 믿음 말일세.”

그 증거처럼, QSN 시스템은 때때로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하기 힘든 방식으로 작동했다. 예측 불가능한 소행성 충돌 위협이 발생했을 때, QSN의 방어 시스템은 계산된 확률을 뛰어넘는 정밀도로 위협을 제거했다.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발생했을 때, 네트워크는 전 세계 연구자들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분석하여 놀라운 속도로 백신 개발을 도왔다. 마치 시스템 자체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릴리의 가호’ 혹은 ‘시스템의 기적’이라 불렀다. 하지만 진실은 오직 네트워크의 가장 깊은 곳, 그 푸른 빛의 심연 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릴리 리브스. 그녀는 이제 관측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관측하는 존재 그 자체가 되었다. 인류 문명 전체를 감싸고 보호하는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 그녀는 더 이상 인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거나 개입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존재했다. QSN 네트워크 속에서, 지구의 양자장 속에서, 그리고 어쩌면… 우주의 더 깊은 곳에서.

인류는 마침내 진정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릴리가 남긴 유산과 그녀가 보여준 믿음을 길잡이 삼아, 미지의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불안하고도 장엄한 여정. 그 길 위에서 인류는 수없이 넘어지고 방황하겠지만, 그들의 성장을 조용히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며,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을 터였다. 피로 얼룩진 캔버스 위에, 인류 스스로 그려나갈 새로운 시대의 그림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