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고통의 시작
제20화
발행일: 2025년 06월 21일
끝없이 이어지는 연구, 풀리지 않는 연속체 가설, 그리고 학계의 싸늘한 시선. 이 모든 것이 마치 거대한 맷돌처럼 칸토르의 정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특히 존경했던 스승 크로네커의 집요하고 공개적인 비난은 그의 예민한 감수성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크로네커는 칸토르의 이론을 ‘수학적 질병’이라 칭하며,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칸토르가 새로운 교수직을 얻으려 할 때마다 크로네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그의 논문은 중요한 학술지에서 푸대접받기 일쑤였다. 마치 거대한 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절망감이었다.
칸토르는 본래 열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위대한 발견이라고 굳게 믿었고, 언젠가는 모든 수학자들이 그 가치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기대와 너무나 달랐다. 돌아오는 것은 칭찬과 인정이 아니라, 오해와 비난, 그리고 냉소적인 무관심뿐이었다.
“나는 단지 진리를 추구했을 뿐인데… 왜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밤낮없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회의감과 싸워야 했고, 동시에 자신을 향한 부당한 공격에 맞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이 이중의 부담감은 그의 정신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1884년 봄, 칸토르의 나이 서른아홉. 그의 정신은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극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 빛나던 그의 눈빛은 초점을 잃었고, 왕성했던 연구 의욕도 급격히 꺾였다.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낮에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할레 대학의 강의를 중단해야 했고, 결국 요양원으로 향해야 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그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요양원의 창밖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과는 달리, 그의 내면은 여전히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크로네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고, 풀리지 않는 연속체 가설의 문제들이 악몽처럼 그를 괴롭혔다.
“내가 틀린 것일까? 나의 모든 연구가 결국 헛된 망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자신감 넘치던 천재 수학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깊은 절망과 자기 회의에 빠진 한 인간의 고뇌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한의 심연을 탐험하던 그의 정신이, 이제는 그 자신이 만들어낸 고독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몇 달간의 요양과 치료 끝에 칸토르의 증세는 다소 호전되었다. 그는 다시 할레 대학으로 돌아와 강의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남겨진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이날 이후, 우울증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히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연구에 집중하기 힘든 시기들이 반복되었다.
이 첫 번째 정신적 붕괴는 칸토르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후 수학 연구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철학, 신학, 문학 등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돌리며 정신적인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학적 문제들에 대한 미련과,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 세상에 대한 깊은 원망이 남아 있었다.
무한의 세계를 최초로 탐험한 위대한 개척자. 그의 정신은 그 자신이 발견한 세계만큼이나 광대하고 심오했지만, 동시에 그만큼이나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웠다. 그의 고통은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 시대를 앞서간 천재가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운명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정신적 고통이 시작된 이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론은 조금씩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젊은 세대의 수학자들 중 일부는 칸토르의 아이디어에 담긴 혁명적인 잠재력을 간파하고 그의 연구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인정의 빛은 아직 너무나 희미했고, 칸토르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앞날에는 여전히 길고 어두운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