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네커의 죽음, 그러나 그림자는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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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7월 08일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법. 칸토르에게 평생의 숙적과도 같았던 레오폴트 크로네커 역시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1891년 12월, 칸토르가 여전히 자신의 이론을 둘러싼 거센 논쟁과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크로네커는 베를린에서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칸토르에게 이 소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평생 자신을 괴롭히고 학문적인 탄압을 가했던 거대한 산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한때 존경했던 스승이자 독일 수학계의 거목이었던 그의 죽음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까? 기록은 그의 내면을 자세히 전해주지 않지만, 크로네커의 부재가 칸토르의 학문적 환경에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크로네커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과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그의 ‘자연수는 신이 만들었고,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작품이다’라는 유한주의적, 구성주의적 수학 철학은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칸토르의 ‘실제 완성된 무한’ 개념에 대한 그의 비판은 여전히 많은 수학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크로네커의 죽음으로 인해 칸토르에 대한 직접적인 인신공격이나 학문적 방해는 줄어들었을지 모르지만, 칸토르의 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오해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독일 학계의 보수적인 분위기는 여전했고, 칸토르의 급진적인 아이디어들은 여전히 주류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받곤 했다.

그러나 크로네커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걷히면서, 칸토르의 이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의 수학자들 중 일부는 크로네커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칸토르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매료되었고, 그의 집합론이 가진 잠재력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크로네커의 유한주의 철학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학문적 흐름을 형성하며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네덜란드의 수학자 라위트전 브라우어(L.E.J. Brouwer)는 크로네커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직관주의(Intuitionism)’라는 독자적인 수학 철학을 구축했다.

브라우어는 수학적 대상은 오직 인간의 직관을 통해 명확하게 ‘구성’될 수 있을 때만 존재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칸토르의 실제무한 개념뿐만 아니라, 고전 논리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 어떤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며 그 중간은 없다)’까지도 무한집합에 대해서는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직관주의는 기존 수학의 많은 부분들을 재검토하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이었으며, 이는 20세기 초 수학의 기초 논쟁을 더욱 뜨겁게 달구는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크로네커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철학적 그림자는 다양한 형태로 수학계에 남아 영향을 미쳤다. 칸토르의 집합론은 여전히 유한주의와 직관주의라는 강력한 비판 세력과 맞서 싸워야 했다.

한편, 칸토르 자신은 크로네커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적인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우울증은 주기적으로 재발했고, 연구에 집중하기 힘든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그는 여전히 연속체 가설 증명에 매달렸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은 조금씩 칸토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비트 힐베르트와 같은 영향력 있는 수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고, 국제 수학자 대회를 통해 그의 업적이 해외에도 알려지면서 칸토르의 집합론은 점차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크로네커는 칸토르에게 평생 동안 넘기 힘든 벽과 같았지만, 그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칸토르의 이론이 새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과정은 더디고 험난했지만, 칸토르가 뿌린 씨앗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다.

크로네커라는 거대한 산은 사라졌지만, 칸토르의 앞에는 여전히 그보다 더 넘기 힘든 내면의 산, 즉 자신의 정신적 고통과 풀리지 않는 수학적 난제들이 남아 있었다. 그의 고독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말처럼, 그의 이론이 마침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날도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그 영광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