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링의 책상 위, 노트에는 방금 끝난 전투의 흔적이 선명했다. ‘정지 문제’는 해결 불가능하다. 그 증명은 완벽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이제 그는 정복한 고지 위에서, 마지막 목표물을 내려다보았다.
다비트 힐베르트의 망령, ‘결정 문제(Entscheidungsproblem)’.
그는 이 거대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더 이상 새로운 무기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방금 얻은 전리품, 즉 ‘정지 문제의 해결 불가능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가장 강력한 파성추(破城槌)가 될 터였다.
그의 전략은 정지 문제를 증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귀류법이었다.
[가정] ‘결정 문제’는 해결 가능하다.
튜링은 눈을 감고 그 가정이 현실이 된 세계를 상상했다.
그 세계에는 ‘결정 문제 해결사(Decision Solver)’라는 궁극의 기계가 존재할 것이다. 이 기계는 어떤 정교한 수학적 명제를 입력하더라도, 유한한 시간 안에 그 명제가 주어진 공리계 내에서 ‘증명 가능한 참’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별해 준다.
이것은 힐베르트가 꿈꾸던 바로 그 기계였다.
튜링은 이 꿈의 기계를 이용하여, 존재가 불가능하다고 증명된 ‘정지 문제 판별기(H)’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만약 만들 수 있다면?
존재 가능한 기계(결정 문제 해결사)를 부품으로 써서, 존재 불가능한 기계(정지 문제 판별기)를 조립해내는 셈이다. 이는 명백한 모순이며, 부품으로 쓰인 ‘결정 문제 해결사’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튜링의 펜이 다시 움직였다. 그는 두 세계를 연결할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어떤 튜링 기계 M과 그 입력값 I가 주어졌다고 하자. 우리는 “M(I)가 정지하는가?”를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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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단계: 튜링은 기계 M과 입력 I의 모든 정보를 담은, 아주 길고 복잡한 단 하나의 수학적 명제,
S(M, I)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 명제 S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계 M이 입력 I를 가지고 계산을 시작했을 때, 유한한 단계의 계산 과정을 거쳐 ‘정지(HALT)’ 상태에 도달하는 유효한 계산 경로가 존재한다.”이 명제
S(M, I)는 그냥 보기에는 복잡할 뿐, 완벽하게 타당한 수학적 명제다. 그리고 그 참/거짓은 오직 한 가지 사실에만 의존한다. 바로 기계 M이 실제로 정지하는지 여부다.- 만약 M(I)가 실제로 정지한다면, 명제 S는 ‘증명 가능한 참’이다.
- 만약 M(I)가 영원히 돈다면, 명제 S는 ‘증명 가능한 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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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 단계: 이제 존재가 불가능한 ‘정지 문제 판별기(H)’를 설계해보자.
- 입력: 기계 M과 입력 I를 받는다.
- 내부 작동:
- 먼저, 입력받은 M과 I를 이용해 위의 ‘번역 단계’를 거쳐 수학적 명제
S(M, I)를 생성한다. - 다음, 이 명제
S(M, I)를 우리가 존재한다고 가정한 ‘결정 문제 해결사’에 입력으로 집어넣는다.
- 먼저, 입력받은 M과 I를 이용해 위의 ‘번역 단계’를 거쳐 수학적 명제
- 출력:
- 만약 ‘결정 문제 해결사’가 “
S(M, I)는 증명 가능한 참이다”라고 판별하면, 우리의 H는 ‘HALTS’라고 외친다. - 만약 ‘결정 문제 해결사’가 “
S(M, I)는 증명 가능한 참이 아니다”라고 판별하면, 우리의 H는 ‘LOOPS’라고 외친다.
- 만약 ‘결정 문제 해결사’가 “
튜링은 설계를 마치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완벽했다.
‘결정 문제 해결사’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이용해 100% 정확하게 작동하는 ‘정지 문제 판별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전 화에서, 튜링 자신은 정지 문제 판별기 H가 논리적 모순 때문에 절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논리의 칼날이 마지막 목표를 향해 휘둘러졌다.
존재한다고 가정한 ‘결정 문제 해결사’를 이용하면, 존재할 수 없는 ‘정지 문제 판별기’를 만들 수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최초의 가정을 파괴하는 것.
튜링은 그의 논문 마지막 부분에 명료한 결론을 기록했다.
“따라서, ‘결정 문제’는 해결 불가능하다.”
체크메이트.
한 세기를 풍미했던 거인의 꿈은, 이 스물네 살 청년의 노트 위에서 마침내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결정 문제의 성은 무너졌다. 힐베르트의 프로그램은 막을 내렸다.
그것은 파괴였지만, 동시에 창조였다. 수학이라는 닫힌 세계의 한계가 명확히 그어지는 순간, 그 한계 안에서 ‘계산’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태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