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으로의 여정

202025년 08월 11일4

1936년 9월, 튜링은 뉴욕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트렁크 하나와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장학금 증서가 들려 있었다. 목적지는 미국 뉴저지 주의 작은 마을, 프린스턴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평범한 시골 마을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비웃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가 있었다. 나치의 광기를 피해 유럽에서 망명한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든 현대 과학의 메카였다.

튜링의 목표는 명확했다. 자신의 보이지 않는 경쟁자이자, 이제는 가장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유일한 사람, 알론조 처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배 위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튜링은 갑판에 나가 대서양의 수평선을 바라보곤 했다. 칠흑 같은 바다는 그가 정의한 '계산 불가능한' 영역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무한함 앞에서 그는 자신의 업적이자 동시에 한계인 '계산 가능성'의 세계를 다시금 되새겼다.

프린스턴 대학의 파인 홀(Fine Hall)에 도착했을 때, 그는 완전히 다른 공기에 압도당했다. 케임브리지의 고풍스러운 전통과 암묵적인 예의범절 대신, 이곳은 자유롭고 격의 없는 에너지로 넘쳐났다. 복도에서는 헝클어진 머리의 젊은 박사들이 칠판 조각을 들고 다니며 격렬하게 토론했고, 티타임에는 수학 농담이 오갔다.

튜링은 알론조 처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그를 맞았다.

“자네가 앨런 튜링이군.”

처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경주를 벌였던 두 명의 경쟁자가 마침내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교수님의 람다 계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튜링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자네의 ‘기계’에 감탄했네. 아주 직관적이고 강력해.”
처치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들의 첫 만남은 길지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단순히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계산’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각각 다른 방향에서 탐험하여, 같은 정상에서 만난 두 명의 탐험가였다.

튜링은 처치의 논리학 세미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상상만 했던 추상적인 논리의 세계가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답게 구축될 수 있는지를 직접 목격했다. 스티븐 클레이니, 존 로서 같은 젊고 총명한 논리학자들과 교류하며 그의 사고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를 가장 매료시킨 인물은 따로 있었다.
헝가리 출신의 이 수학자는 마치 살아있는 컴퓨터처럼 보였다. 그의 두뇌는 어떤 문제든 순식간에 핵심을 파악하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계산을 처리했다. 그는 농담처럼 “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비슷한 존재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반신(demigod)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의 이름은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었다.

폰 노이만은 튜링의 논문을 이미 깊이 있게 읽은 상태였다. 어느 날 오후 티타임, 폰 노이만은 튜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튜링 군, 자네의 ‘보편 기계’ 말이야. 아주 흥미로운 개념이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한 논리적 장난감 이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폰 노이만의 눈이 빛났다.
“만약… 만약 자네의 그 기계를, 종이테이프와 상상 속의 헤드가 아니라, 실제 진공관과 전선, 계전기를 사용해서 물리적으로 구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튜링은 순간 숨을 멈췄다.
지금까지 그의 기계는 순수한 관념의 산물이었다. 결정 문제를 풀기 위한 논리적 도구. 하지만 폰 노이만은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는 튜링의 추상적인 설계도에서,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범용 계산 기계’의 청사진을 읽어낸 것이다.

프린스턴에서의 여정은 튜링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는 처치를 통해 논리의 깊이를 배웠고, 폰 노이만을 통해 자신의 이론이 품고 있는 무한한 현실적 가능성을 보았다.

그의 이론적 탐구, 즉 인생의 1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폰 노이만의 질문은, 그의 이론이 현실 세계에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예고하는, 새로운 시대의 서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