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틀 뒤,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더 이상 가상의 시나리오는 없었다. 전쟁은 현실이 되었다.
바로 다음 날, 앨런 튜링은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작은 도시 블레츨리(Bletchley)로 향했다. 그에게 전달된 지시는 간결하고 비밀스러웠다. “블레츨리 파크 역에 내릴 것. 그곳에서 누군가 당신을 안내할 것이다.”
블레츨리 파크.
겉보기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평범한 빅토리아 시대풍의 저택이었다. 잘 가꿔진 정원과 연못. 그러나 그 고요한 풍경 뒤에는 대영제국의 가장 중요한 비밀 기지가 숨겨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정부 암호 학교(GC&CS)의 새로운 본부, 코드명 ‘스테이션 X’였다.
튜링이 저택의 육중한 문을 들어섰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세계와 마주했다.
복도와 방은 임시로 세운 합판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고,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타자기 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기계음이 뒤섞여 기묘한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영국 전역에서 비밀리에 징집된, 가장 명석한 두뇌들이었다. 튜링처럼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온 수학자들, 언어학의 대가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 전문가, 심지어는 전국 체스 챔피언과 크로스워드 퍼즐 대회 우승자들까지 있었다.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였다.
나치 독일의 암호 통신을 감청하고, 해독하고, 그 안에 담긴 군사 기밀을 빼내는 것.
튜링은 ‘허트 8(Hut 8)’이라 불리는 낡은 목조 가건물로 배정받았다. 그의 임무는 명확했다.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이 사용하는 암호 체계를 분석하고 격파하는 것이었다. 대서양의 제해권, 그리고 영국의 생명줄인 보급로의 운명이 그의 손에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트 8의 분위기는 자유로우면서도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격식이나 계급은 무시되었다. 튜링 같은 저명한 학자나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나, 모두가 서로의 이름이나 별명을 부르며 수평적으로 토론했다. 튜링의 괴짜 같은 성격, 더듬는 말투,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옷차림은 이곳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의 두뇌가 내놓는 결과물뿐이었다.
그는 동료 수학자 휴 알렉산더, 피터 트윈 등과 함께 칠판 앞에 서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들의 책상 위에는 독일군으로부터 감청된, 의미를 알 수 없는 다섯 글자짜리 알파벳 뭉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QKJSI PWEOS NVCFG...
이 무의미해 보이는 문자열 뒤에는 독일 잠수함 U-보트의 이동 경로, 공격 계획, 보급 상황 같은 핵심 정보가 숨겨져 있었다. 매일 아침 해독에 실패했다는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그것은 대서양 어딘가에서 연합군 수송선 수십 척이 격침되고 수천 명의 선원이 차가운 바닷속으로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곳 블레츨리 파크에서는 시간이 곧 생명이었다.
튜링은 이 암호의 본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적은 인간 암호원이 아니었다.
그들의 적은 교활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 바로 ‘에니그마(Enigma)’였다.
튜링은 책상 위에 놓인 에니그마의 설계도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전선과 회전자, 플러그보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것이 단순한 기계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상상했던 튜링 기계의 사악한 쌍둥이처럼 보였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입력을 출력으로 변환하는 기계.
다만 그 목적이 계산이 아니라 ‘혼돈’을 생성하는 데 있다는 점만 달랐다.
튜링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기계를 이기려면, 이 기계보다 더 빨리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어야 해.”
그의 머릿속에서, 프린스턴에서 폰 노이만과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추상적인 논리 기계를 현실의 물리적 기계로 구현하는 것.
그것은 더 이상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제는 조국의 운명이 걸린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어 그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의 사투는 이미 불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