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계산기의 한계

252025년 08월 14일4

블레츨리 파크의 초기 암호 해독 작업은 폴란드 정보국이 남긴 유산에 크게 의존했다. 전쟁 직전, 폴란드 암호국은 자신들이 개발한 '봄바(Bomba)'라는 원시적인 해독 기계의 설계도와 에니그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자료를 영국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튜링과 동료들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해독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의 주된 무기는 인간의 두뇌와 연필, 그리고 '천공 카드' 시스템이었다.

작업 방식은 이랬다.
먼저, 감청된 수많은 독일군 전문 속에서 '크립(Crib)'을 찾아야 했다. 크립이란, 암호문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평문(원문) 단어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6시에 보내는 기상 보고에는 반드시 ‘WETTER’(날씨)라는 단어가 포함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식이었다.

만약 감청된 암호문 ‘YKNAWET’이 평문 ‘WETTER’에 해당한다고 가정해보자.

  • W -> Y
  • E -> K
  • T -> N
  • T -> A
  • E -> W
  • R -> E
  • -> T

이 대응 관계는 에니그마의 특정 설정을 통과하며 만들어진 결과다. 튜링과 그의 팀은 이 짧은 조각을 단서로, 논리적 모순을 찾아 나섰다.

예를 들어, 네 번째 자리의 ‘T’는 ‘A’로 암호화되었는데, 일곱 번째 자리의 ‘T’는 ‘T’로 암호화되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에니그마의 반사판 구조 때문에, 어떤 글자도 자기 자신으로 암호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암호문은 ‘WETTER’가 아니거나, 우리가 추측한 위치가 틀렸음이 즉시 증명된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논리적 모순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가능성들을 가지고, 여성 인력들로 구성된 ‘인간 계산기’ 팀이 천공 카드 기계로 일일이 확인 작업을 벌였다.

이 방식은 초반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독일 해군의 허술한 암호 운용 습관 덕분이었다. 암호병들은 여자친구 이름이나 ‘HH(Heil Hitler)’ 같은 예측 가능한 단어를 회전자 초기 위치로 설정하곤 했다.

하지만 1940년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 해군은 에니그마의 운용 절차를 대폭 강화했다.
첫째, 회전자의 종류를 3개에서 5개로 늘리고, 그중 3개를 골라 사용하게 했다. 회전자 배열 경우의 수가 6가지에서 60가지로 10배나 증가했다.
둘째, 플러그보드에 연결하는 전선의 개수를 6개에서 10개로 늘렸다. 경우의 수는 수십만 배로 폭증했다.

블레츨리 파크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크립’을 이용한 수작업 방식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하루 종일 수백 명의 인력이 달라붙어 계산해도, 자정이 되기 전에 그날의 키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허트 8의 분위기는 절망으로 가득 찼다.
매일 아침 상황판에는 격침된 연합군 선박의 수가 끔찍한 숫자로 업데이트되었다. 대서양은 U-보트의 사냥터가 되었고, 영국의 생명줄은 말라가고 있었다. 동료들은 좌절감에 고개를 숙였고, 어떤 이들은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튜링은 굳은 얼굴로 상황판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에는 수천 명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는 깨달았다.
더 이상 인간의 지능과 끈기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것은 연필과 종이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계산’의 속도 문제다.
인간이 하루에 수백, 수천 번의 계산을 할 때, 기계는 1초에 수만, 수십만 번의 논리적 검증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4년 전 프린스턴의 평화로운 잔디밭에서 상상했던 ‘기계’가 다시 떠올랐다.
그때는 순수한 지적 유희였지만, 이제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튜링은 자리로 돌아와 종이를 꺼냈다.
그는 폴란드의 ‘봄바’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기계의 설계를 시작했다. 인간의 추측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에니그마의 논리적 모순을 전기 회로의 속도로 스스로 찾아내는 기계.

그의 뇌리에 맴도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기계는, 기계로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