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기계로 잡아야 합니다

262025년 08월 14일4

허트 8의 회의실은 담배 연기와 좌절감으로 자욱했다. 지휘관인 알라스테어 데니스턴은 굳은 얼굴로 상황을 보고했다.

“오늘 아침까지, U-보트의 위치를 단 하나도 파악하지 못했네. 대서양은 사실상 눈을 감은 거나 마찬가지야.”

동료들의 얼굴에는 무력감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칠판에 적힌 수많은 경우의 수를 노려보았지만, 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튜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듬거렸지만, 그 내용은 회의실의 공기를 가를 만큼 단호했다.

“우리는… 우리는 지금… 잘못된 방식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튜링은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계속해서 ‘크립(Crib)’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독일군이 ‘WETTER’나 ‘AN DEN’(To the) 같은 단어를 쓸 것이라는 ‘추측’에 기반하고 있죠. 하지만 그들이 운용 절차를 바꾸거나, 예측 불가능한 단어를 쓰기 시작하면 우리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는 칠판에 적힌 암호문과 평문 대응 관계를 가리켰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 아닙니다. 메시지의 ‘구조’입니다. 에니그마 기계가 가진,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구조 말입니다.”

튜링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크립’을 사용하는 것은 같았지만, 접근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가령, 우리가 암호문 속 어딘가에 ‘HEILHITLER’라는 단어가 있을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H E I L H I T L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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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Q Z W S X E D C V (가상의 암호문)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글자들의 관계입니다. 첫 번째 HA로, 다섯 번째 HS로 암호화되었습니다. EQX로, IZW로 변환되었죠.”

그는 칠판에 원을 그리고 알파벳을 적은 뒤, 이 관계들을 화살표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H -> A, A -> S, S -> H. 이런 식으로 글자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루프(loop)’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었다.

“보십시오. H는 두 번 나타나고, EI, L, T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평문 글자가 암호문에서 여러 다른 글자로 변환되는 이 관계의 그물망.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공격할 지점입니다.”

튜링의 설명이 이어졌다.
“에니그마의 특정 회전자 배열과 위치 설정에서는, 이와 같은 논리적 루프가 형성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설정에서는 HA로 변환하고 AS로 변환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어떤 설정에서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모든 과정을 자동화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기계는 수십 개의 에니그마 회전자를 동시에 돌리면서, 우리가 가정한 ‘크립’의 논리적 구조와 모순되지 않는 설정을 찾아내는 겁니다.”

“기계는 가능한 모든 회전자 위치(17,576가지)를 빠른 속도로 검사합니다. 그러다가 만약 어떤 설정이 우리의 ‘루프’ 가설과 논리적으로 충돌한다면, 예를 들어 ‘A는 A로 암호화된다’는 모순이 발생하면, 그 설정은 즉시 폐기하고 다음 설정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이 과정을 수만 번 반복하다 보면, 결국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단 하나의 ‘올바른’ 설정값만이 살아남게 되겠죠.”

회의실은 침묵에 잠겼다.
튜링이 제안한 것은 단순히 계산 속도를 높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암호 해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었다. 인간의 추측과 직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기계가 순수한 논리 연산을 통해 정답의 후보를 걸러내게 하자는 발상이었다.

지휘관 데니스턴이 물었다.
“그런 기계를… 정말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튜링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 만들어야만 합니다. 기계는 기계로 잡아야 합니다. 더 이상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괴짜 수학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론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엔지니어의 확신이 서려 있었다. 블레츨리 파크의 운명을 바꿀 새로운 기계, ‘봄브(Bombe)’의 개념이 마침내 공식적으로 제안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