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틀의 무게

332025년 08월 19일4

구글의 한 강당.
드미트리는 어색한 기분으로 연단에 섰다. 그의 앞에는 갓 입사한 수십 명의 신입 엔지니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W3C의 치열한 논쟁이나, 밤샘 디버깅의 긴장감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압박감이었다.

그를 소개한 교육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크롬의 WebGPU 프로젝트를 초기부터 이끌어 온 드미트리 말리쇼프 님을 모셨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만들어갈 웹의 미래가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지,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이 될 겁니다.”

‘선구자’, ‘리더’. 언제부턴가 그에게 붙기 시작한 수식어들이었다. 그는 아직 그 무게가 익숙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아마 WebGPU의 기술적인 내용에 대해 더 궁금해하실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코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려고 합니다. 대신, 이 프로젝트가 ‘왜’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는 슬라이드 한 장을 띄웠다. 거기에는 복잡한 다이어그램 대신, 몇 개의 회사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구글, 애플, 모질라, 마이크로소프트.

“많은 사람들이 WebGPU를 구글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WebGPU는 이 로고들이 상징하는,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거대한 커뮤니티의 결과물입니다.”

그는 프로젝트 초기의 기억을 떠올렸다.
“프로젝트의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애플의 ‘WebMetal’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제안은 매우 강력했고, 우리를 압박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압박에 맞서 더 나은, 더 보편적인 대안(NXT)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웹 그래픽의 미래는 특정 회사의 생태계에 종속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경쟁이 더 나은 혁신을 낳은 완벽한 예시죠.”

신입 엔지니어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또 다른 원동력은 모질라의 ‘wgpu’였습니다. 우리가 C++로 Dawn을 만드는 동안, 그들은 Rust라는 다른 언어로, 다른 관점에서 똑같은 사양을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실수를 발견해주고, 사양 문서의 모호한 부분을 명확하게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Dawn만이 유일한 구현체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에 갇혀 수많은 문제점을 놓쳤을 겁니다. 두 개의 독립적인 구현체는 서로를 비추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었습니다.”

드미트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강당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은 앞으로 수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겁니다. 그때, 여러분의 코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바로 문서입니다. 상세한 에러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태도입니다.”

그는 출시 직전, 개발자 커뮤니티의 피드백을 받아 에러 메시지를 전면적으로 수정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기술적 완벽함보다 중요한 것이 사용자와의 소통임을 강조했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엔지니어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수많은 기술적, 정치적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 WebGPU 프로젝트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 단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강당의 모든 시선이 드미트리에게로 향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훌륭한 동료들, 올바른 기술적 판단, 경영진의 지원…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단 하나를 꼽으라면, ‘인내심’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강당이 조용해졌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합의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 당장의 편의를 위해 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더 어렵더라도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버티는 인내심. 수천 번의 사양 변경에 따라 코드를 지우고 다시 쓰는 것을 견뎌내는 인내심.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웹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투자라고 믿는, 길고 긴 인내심입니다.”

그는 말을 맺었다.
“WebGPU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내심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드미트리는 연단에서 내려오며, 질문을 던졌던 젊은 엔지니어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눈빛.

드미트리는 이제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을. 그는 이제 새로운 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항해를 준비하는 새로운 선원들에게 등대의 위치를 알려주고, 그들이 물려받을 맨틀의 무게를 일깨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가 느꼈던 어색함은, 바로 그 책임감의 무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