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의 삶은 이제 코드보다 사람과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수많은 팀과의 협력, 커뮤니티 지원, 그리고 차세대 개발자들을 위한 멘토링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정상에 올랐던 정복자의 허무함은 사라지고, 거대한 생태계를 가꾸는 정원사의 뿌듯함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의 일상이 다시 한번 흔들린 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아내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였다.
“드미트리, 이제 곧 나올 것 같아. 병원으로 와줘.”
몇 시간의 초조한 기다림 끝에, 그는 마침내 작고 붉은 생명체를 품에 안았다. 그의 첫 아이, 딸이었다. 세상 그 어떤 코드의 완성보다도 경이롭고 벅찬 순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책임감과 마주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서툰 솜씨로 아기를 돌보며 육아휴직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밤낮이 바뀐 생활, 끊임없이 울리는 알람 시계 대신 아기의 울음소리에 잠을 깨는 일상. 실리콘밸리의 치열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평화롭지만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잠든 아기를 안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잠시 외출했고, 집 안에는 아기의 고른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거실에 놓인 태블릿PC를 집어 들었다.
그는 무심코 아이들을 위한 교육용 앱 스토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알파벳을 가르치는 앱, 동물을 보여주는 앱, 그리고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인체 탐험 3D’라는 앱이 있었다.
그는 앱을 설치하고 실행했다.
태블릿 화면에 놀랍도록 정교한 인체의 3D 모델이 나타났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돌리자, 심장이 박동하고 혈액이 혈관을 따라 흐르는 모습이 매끄럽게 펼쳐졌다. 뼈, 근육, 신경계 등 각 부분을 선택하면 해당 부위가 확대되며 상세한 정보가 나타났다.
그래픽의 품질과 인터랙션의 부드러움은 네이티브 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는 감탄하며 앱의 정보를 확인했다.
“이 앱은 웹 기술로 만들어졌으며, 별도의 설치 없이 브라우저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즉시 태블릿의 브라우저를 열고 해당 웹사이트 주소로 접속했다. 로딩은 순식간이었고, 앱과 완벽하게 동일한 3D 인체 모델이 브라우저 탭 안에서 유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크롬 개발자 도구를 열었다. (안드로이드 태블릿에서는 USB 디버깅을 통해 데스크톱에서 개발자 도구를 연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콘솔 창에 한 줄의 코드를 입력했다.
await navigator.gpu.requestAdapter();
엔터를 치자, GPUAdapter
객체의 정보가 콘솔에 출력되었다.
이 웹사이트는 WebGPU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순간, 드미트리는 모든 것을 잊었다.
그는 더 이상 이 기술을 만든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한 명의 사용자, 한 명의 아버지가 되어 화면 속 인체 모델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상상했다.
몇 년 뒤, 자신의 딸이 이 태블릿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아이가 “아빠, 내 심장은 어떻게 생겼어?”라고 물을 때, 그는 복잡한 의학 서적을 펼치는 대신, 이 앱을 보여주며 함께 심장의 내부를 탐험하고, 판막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눈앞에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기술이, 그저 게임을 더 빠르게 돌리거나, 개발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의 배움과 호기심을 선물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결과였다.
그는 텅 빈 정상에서 내려와, 개발자들의 곁에 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의 기술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 평범한 사람들의 거실, 그리고 아이들의 작은 손 안까지 도달해 있었다.
품에 안겨 잠든 딸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드미트리는 조용히 다짐했다.
그는 이 기술을 더 안전하고, 더 안정적이며,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서 미래의 자신의 딸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이 놀라운 도구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그 다짐은 더 이상 엔지니어로서의 사명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느끼는, 따뜻하고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그의 여정은 새로운 원동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그가 지금까지 겪어왔던 그 어떤 기술적 난관보다도 강하고 단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