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경계

792025년 09월 11일5

타임스탬프 쿼리 기능에 대한 논의가 W3C에서 진행되는 동안, 드미트리는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또 다른 종류의 ‘경계’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하드웨어나 API의 경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신뢰’의 경계였다.

사건의 발단은 구글의 광고 기술(Ad-Tech) 팀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웹 페이지에 표시되는 광고의 보안과 성능을 책임지는 부서였다. 그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제3자(Third-party) 광고 스크립트가 호스트 페이지의 성능이나 안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광고 기술팀의 보안 아키텍트, 엘레나가 드미트리를 찾아왔다.
“드미트리, WebGPU는 광고 생태계에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광고주들은 이제 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는 화려한 3D 광고를 만들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동시에, 저희에게는 새로운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한 뉴스 웹사이트의 예시를 보여주었다.
페이지의 본문 내용은 평범했지만, 한쪽에 있는 작은 배너 광고 영역에서는 WebGPU로 만들어진 현란한 자동차 광고가 렌더링되고 있었다.

엘레나가 말했다.
“이 광고 스크립트는 저희가 통제할 수 없는 제3자 서버에서 로드됩니다. 저희는 이 스크립트가 무슨 짓을 할지 전혀 알 수 없죠. 만약 이 광고가 악의적으로, 혹은 부주의하게, 페이지의 모든 GPU 자원을 독점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뉴스 기사의 스크롤이 버벅거리고, 다른 비디오 재생이 멈추는 등, 전체 페이지의 사용자 경험이 이 작은 광고 하나 때문에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녀의 우려는 정당했다.
이것은 iframe 안에서 실행되는 제3자 코드의 고전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WebGPU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GPU는 시스템 전체에서 공유되는, 매우 강력하고 제한적인 자원이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필요한 것은 ‘자원 격리’입니다.”
엘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호스트 페이지(뉴스 사이트)가 사용하는 GPUDevice와, iframe 안의 광고가 사용하는 GPUDevice는 논리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물리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iframe 안의 광고가 사용할 수 있는 GPU 자원의 총량—메모리 사용량, 셰이더 연산량 등—에 제한(Quota)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드미트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요구사항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WebGPU를 단일 애플리케이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다. 하나의 페이지, 하나의 컨텍스트가 모든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시나리오.
하지만 이제 그는, 하나의 페이지 안에서 서로 다른 신뢰 수준을 가진 여러 개의 ‘세입자’들이 GPU라는 한정된 공간을 어떻게 안전하게 나누어 쓸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풀어야 했다.

드미트리는 이 문제가 Dawn 엔진 레벨에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즉시 깨달았다. 이것은 브라우저의 프로세스 모델과 샌드박싱 아키텍처 자체를 건드려야 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는 크롬의 샌드박싱 팀과 머리를 맞댔다.
샌드박싱 팀의 제안은 명확했다.
“제3자 iframe에서 requestDevice가 호출될 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GPUDevice를 반환해야 합니다. 이 ‘제한된 디바이스(Restricted Device)’는 기능적으로는 일반 디바이스와 동일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브라우저 커널에 의해 엄격한 자원 할당량의 감시를 받는 거죠.”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난관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공정하고 효과적인 할당량 모델을 만들 것인가?
총 GPU 메모리의 몇 퍼센트를 할당해야 하는가? 셰이더 연산량은 어떻게 측정하고 제한할 것인가?
만약 광고가 할당량을 초과하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작업을 즉시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속도를 점진적으로 늦출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브라우저 벤더들과 광고 기술 산업계가 참여하는 새로운 워킹 그룹, ‘Web Advertising and Privacy Business Group’에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드미트리는 이 회의에 참석하며, 기술의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광고주들은 최대한 화려하고 효과적인 광고를 원했다.
사용자들은 빠르고 쾌적한 브라우징 경험을 원했다.
그리고 브라우저는 그 둘 사이에서, 보안과 성능, 그리고 비즈니스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WebGPU는 그 줄타기의 난이도를 극적으로 높여버린 새로운 변수였다.

드미트리는 이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이것은 기술뿐만 아니라, 정책과 합의가 필요한 영역이었다.
그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제기한 문제는, WebGPU가 단순한 그래픽 기술을 넘어, 웹 경제의 핵심 인프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생태계의 모든 참여자들이 공존할 수 있는, 공정한 규칙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그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그의 여정은 이제,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따라, 기술과 비즈니스, 그리고 사용자 경험이라는 세 개의 대륙이 만나는 복잡한 지정학적 문제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