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의 자원 격리 문제, 다중 GPU 지원, 레이 트레이싱. 드미트리를 둘러싼 문제들은 점점 더 거대하고 복잡해져 갔다. 그는 이제 웹 플랫폼의 미래를 좌우하는 거대한 논의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무게감에 지쳐가던 어느 날, 그는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인은 뜻밖에도, 그가 다니는 대학의 생물학과 교수였다.
“드미트리 말리쇼프 님께, 당신이 구글에서 WebGPU 프로젝트를 이끌었다는 기사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혹시 저희 연구실에 잠시 방문하여, 저희가 직면한 데이터 시각화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드미트리는 호기심과 함께, 잠시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초대에 응했다.
며칠 후, 그가 방문한 대학의 생물학 연구실은 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낡은 현미경과 시약 냄새, 그리고 벽을 가득 메운 복잡한 계통수(Phylogenetic Tree) 그림들.
연구실을 이끄는 에블린 교수가 그를 맞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미트리. 저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생명의 나무’를 그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화면에 거대한 데이터를 띄웠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수십만 종의 생물들의 유전자 염기서열 데이터였다.
“저희는 이 유전자 데이터를 비교 분석하여, 모든 생물 종들이 어떤 공통 조상으로부터 어떻게 진화하고 분기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3차원 계통수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데이터의 규모입니다.”
그녀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시각화 소프트웨어를 실행했다. 화면에는 수만 개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나무 구조가 나타났다. 하지만 데이터를 조금만 확대하거나 회전시키려고 하자, 프로그램은 즉시 버벅거리며 응답을 멈췄다.
“저희가 다루려는 데이터는 수십만, 수백만 개의 노드(종)를 가집니다. 기존의 어떤 소프트웨어로도 이 규모의 네트워크를 실시간으로 탐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희는 몇 년째 이 시각화의 병목에 갇혀 있습니다.”
그녀는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물었다.
“WebGPU라면,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 순간, 드미트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결해왔던 문제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도전을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게임의 프레임 속도를 높이거나, 광고의 성능을 제어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인류의 근원에 대한 탐사를, 기술의 한계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에블린 교수와 그녀의 연구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댔다.
이 거대한 그래프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렌더링할 것인가?
드미트리는 메시 셰이더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교수님, 만약 우리가 이 수백만 개의 노드와 엣지 정보를 GPU에 통째로 넘겨준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사용자가 특정 부분을 확대하면, 메시 셰이더가 그 즉시 시야에 들어오는 부분의 상세한 나무 구조 지오메트리를 동적으로 생성해주는 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전체 나무를 한 번에 그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어서 컴퓨트 셰이더를 활용한 상호작용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사용자가 특정 종(노드)을 클릭하면, 컴퓨트 셰이더가 실시간으로 그 종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관계에 있는 다른 종들을 계산해서 하이라이트 해줄 수도 있습니다. 복잡한 관계망을 직관적으로 탐색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의 아이디어에, 연구원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데이터가 가진 잠재력을 시각화할 새로운 언어를 발견한 듯했다.
그날 이후, 드미트리는 자신의 여가 시간을 쪼개어 이 프로젝트의 기술 자문을 맡기 시작했다. 그는 코드를 직접 짜주는 대신, 생물학 연구원들이 WebGPU의 개념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문제에 맞게 적용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파이프라인과 셰이더, 버퍼의 개념을, 생물학의 실험 과정에 비유하여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을 들은 젊은 대학원생 한 명이, 몇 주 만에 놀라운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냈다.
에블린 교수는 드미트리에게 그 프로토타입 데모를 보여주었다.
태블릿 화면 속에서, 수십만 개의 빛나는 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생명의 나무가 부드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사용자가 특정 영역을 확대하자, 마치 은하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복잡한 가지 구조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진화의 장엄한 풍경이었다.
에블린 교수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드미트리, 당신은 우리에게 현미경을 선물한 겁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생명의 가장 깊은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현미경을요.”
드미트리는 화면 속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생명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3D 데모보다도 아름답고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만든 기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 기술 자체의 성능이나 복잡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 과학자들, 예술가들의 손에 들려, 인류의 지식을 확장하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깊게 만드는 데 쓰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그의 여정은 이제 기술의 세계를 넘어,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그 위대한 탐사의 여정에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는, 이름 없는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