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속의 유령
제59화
발행일: 2025년 06월 28일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광고 문구는 팀에 엄청난 충격과 흥분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광고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자신감을 얻은 팀은 다음 단계, 즉 이미지 생성 AI에 도전하기로 했다.
목표는 유니레버의 가상 신제품, ‘오션 브리즈 바디워시’를 위한 광고 배너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제품의 핵심 컨셉은 ‘상쾌한 바다의 향기’와 ‘풍성한 거품’이었다.
알렉스는 팀원들과 함께 AI 모델에 전달할 명령어, 즉 ‘프롬프트(Prompt)’를 신중하게 작성했다.
"사실적인 스타일, 깨끗하고 밝은 느낌,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샤워를 하며 상쾌하게 웃고 있는 30대 여성, 풍성한 거품이 어깨를 감싸고 있음"
엔지니어 중 한 명이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실행 버튼을 눌렀다. 팀원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몇 초간의 처리 시간 후, 이미지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미지는 여러 면에서 놀라웠다. 배경의 푸른 바다는 사진처럼 사실적이었고, 여성의 피부 질감이나 물방울의 표현은 흠잡을 데 없이 정교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미지 속 여성의 ‘손’이 이상했다. 손가락이 여섯 개였다.
“이게… 뭐야?”
한 팀원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프롬프트를 약간 수정하여 다시 이미지를 생성했다. 이번에는 손가락은 다섯 개였지만,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그녀의 몸을 통과하고 있었다. 또 다른 시도에서는 여성의 팔이 기괴하게 세 개나 그려졌다.
알렉스는 이 기괴한 결과물들을 보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AI는 아직 세상의 물리 법칙이나 인간의 해부학적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수억 개의 이미지를 학습했지만, ‘손가락은 다섯 개여야 한다’거나 ‘물은 고체를 통과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온전히 체득하지 못한 겁니다.”
회의실을 채웠던 흥분은 차갑게 식었다. AI가 텅 빈 캔버스에서 완벽한 창작물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섣부른 환상이었다. 기계 속의 유령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팀은 좌절감에 빠졌다. 하지만 알렉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접근 방식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이미지를 ‘창조’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편집’하고 ‘보강’하는 역할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그의 아이디어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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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제거 및 합성 (Background Removal & Composition):
- 광고주가 제공한 고품질의 제품 사진(바디워시 병)에서, AI가 배경을 완벽하게 제거한다. 그리고 AI가 생성하거나, 라이선스를 구매한 고품질의 배경 이미지(예: 아름다운 해변 사진)와 자연스럽게 합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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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수정 (Inpainting):
- 기존 광고 모델 사진에서,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만 다른 색으로 바꾸거나, 사소한 흠집을 지우는 등, 이미지의 특정 부분만을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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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 (Outpainting):
- 기존의 4:3 비율 사진의 바깥 영역을, AI가 원래 이미지의 스타일과 맥락에 맞춰 자연스럽게 상상해서 그려내어, 16:9 비율의 와이드 배너 이미지로 확장한다.
팀은 이 새로운 접근 방식에 따라 프로토타입을 수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AI는 창조의 영역에서는 실수를 연발했지만, 기존 창작물을 보조하고 확장하는 편집자의 역할은 놀라울 정도로 잘 수행했다.
알렉스는 이 경험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할 때는, 그 기술의 현재 수준과 명확한 한계를 직시하고, 가장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용 사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팀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우리는 AI 화가를 고용하려다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한 ‘AI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를 얻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유니레버 같은 광고주들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팀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기계 속 유령을 완벽한 예술가로 만들려는 욕심을 버리고, 그를 유능한 조수로 인정하자, 비로소 AI와 인간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