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여기까지 왔죠?” (Reprise)
제88화
발행일: 2025년 07월 12일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알렉스가 제시했던 새로운 시대의 설계도는 더 이상 화이트보드 위의 꿈이 아니었다. 그의 팀과 회사 전체의 노력 끝에, 많은 것들이 현실이 되었다.
프라이버시 샌드박스의 주요 기술들은 웹 표준으로 채택되기 시작했고, ‘오픈 비딩’은 업계의 당연한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기업들은 데이터 클린룸을 통해 안전하게 협업했고, AI는 엄격한 윤리적 가드레일 안에서 작동했다. 세상은 느리지만 분명히, 더 투명하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이제 광고 사업 부문 전체의 기술 전략을 총괄하는 부사장(VP of Engineering)이 되어 있었다. 그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지만, 시야는 더 넓어졌다.
어느 맑은 오후, 알렉스는 회사 캠퍼스를 걷다가 우연히 한 무리의 신입사원들이 야외 테이블에 모여 토론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이제 막 팀 리드가 된, 훌쩍 성장한 ‘레오’가 있었다.
레오는 화이트보드에 복잡한 시스템 다이어그램을 그려놓고, 신입사원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입사원들의 표정은 과거 알렉스가 만났던 클로이처럼, 혼란과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한 신입사원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알렉스는 멀리서도 그 질문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팀장님, 이 시스템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기술들이 얽혀 있어서, 마치 고고학 유적지 같아요. 어떤 부분은 프라이버시 샌드박스 API를 쓰고, 어떤 부분은 여전히 ADID를 참조하고, 또 어떤 부분은 컨텍스트 타겟팅 엔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왜 이렇게 복잡하게 공존해야만 하는 건가요? 대체… 저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죠?”
그것은 몇 년 전, 알렉스가 들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다.
레오는 잠시 미소를 짓더니, 신입사원들을 향해 말했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최고의 답변이 여기 있습니다.”
레오는 자신의 노트북을 열어, 하나의 웹페이지를 스크린에 띄웠다. 그것은 구글의 공식 개발자 블로그에 연재되었던, 바로 알렉스의 ‘프로그래머틱 광고 연대기’였다.
“여러분, 이 글을 읽어보세요.” 레오가 말했다. “이것은 우리 팀의 전설적인 리더, 알렉스 노튼 부사장님께서 직접 기록하신 우리 팀의 역사입니다. 이 글 안에는 여러분이 던진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담겨 있습니다.”
레오는 연대기의 각 챕터를 클릭하며, 신입사원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 컨텍스트 타겟팅을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요? 그 답은 ‘제5장: 쿠키 없는 미래’ 편에 있습니다. 모든 사용자 추적이 불가능해졌을 때,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안전망이었기 때문이죠.”
“왜 ADID가 여전히 시스템에 남아있냐고요? ‘제4장: 모바일 혁명’ 편을 읽어보세요. 쿠키가 통하지 않는 앱의 세계에서, 이것이 우리가 발명한 최초의 신분증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라이버시 샌드박스가 왜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제6장: 대심판과 종말’ 편에 나오는 GDPR과의 사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신입사원들은 레오의 설명과 함께, 연대기의 각 챕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혼란이 걷히고, 비로소 각각의 기술적 결정 뒤에 숨겨진 치열한 고민과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알렉스는 멀리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자신이 기록했던 이야기가, 이제는 자신의 손을 떠나, 다음 세대의 리더인 레오의 목소리를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지식과 경험, 그리고 철학이 단절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계승되는, 그가 꿈꿨던 가장 이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직접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남긴 ‘연대기’가 그를 대신하여,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동료들에게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해 줄 터였다.
알렉스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역할은 이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느꼈다. 이제 이 이야기는, 레오와 클로이, 그리고 앞으로 올 수많은 새로운 세대들이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연대기는 이제 그들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살아 숨 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