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질서
제45화
발행일: 2025년 06월 15일
전쟁의 상흔은 깊었다. 런던 시내는 물론, 전 세계 주요 도시는 차원 균열이 남긴 파괴의 흔적과 에크릴 강림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인류 문명은 멸망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크릴의 선언 – ‘관리 하의 자율성’. 그것은 인류에게 내려진 족쇄이자 동시에 기회였다. 아키텍트의 감시라는 제약은 뼈아팠지만, 외계 문명과의 공식적인 관계 수립, 그리고 인류가 가진 ‘양자적 잠재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릴리 리브스가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17세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코바치의 폐허 위에서 에크릴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 사실상 인류의 비공식적인 대표자이자 아키텍트와의 유일한 소통 창구가 되었다. 그녀 안에 융합된 아버지 에단의 과학적 지식과 분석력, 어머니 사만다가 남긴 통찰력과 온화함, 그리고 엘라나의 희생적인 믿음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는 너무나 어렸지만, 그 위에 놓인 책임감의 무게는 행성만큼이나 무거웠다.
릴리는 가장 먼저 국제 사회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의 비공개 회의, 주요 강대국 정상들과의 핫라인 통화.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 우주의 진실, 아키텍트의 존재와 최후통첩, 그리고 '관리 하의 자율성'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대해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불신과 혼란, 심지어 적대감마저 있었지만, 릴리가 가진 압도적인 존재감과 그녀가 제시하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 앞에서 그들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MI6의 보고서, 엘라나의 마지막 기록 등이 그 증거였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릴리는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영상 메시지를 통해 말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각국 정상들의 모니터 화면 너머, 그들의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 깊었다. “과거의 불신과 갈등을 반복하며 자멸할 것인가, 아니면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인류 전체가 하나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인가.”
그녀는 아키텍트의 감시 속에서도 인류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하고, 다가올 외계 문명과의 교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했다. 그 핵심은 ‘양자 안정화 네트워크’의 구축이었다.
이 네트워크는 전 지구적인 규모로 건설될 것이며, 다음과 같은 목표를 가졌다.
- 잠재적 능력자 관리: 인류에게 발현될 수 있는 잠재적인 양자 능력자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그들의 능력이 안전하게 발현되고 통제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과 지원 시스템을 제공한다. 릴리 자신이 이 시스템의 핵심 관리자이자 멘토 역할을 맡게 될 터였다.
- 위험 능력 억제: 통제 불가능하거나 악의적인 목적의 능력 발현을 감지하고 억제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아키텍트에게 인류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 외계 소통 채널: 앞으로 접촉하게 될 다른 외계 문명과의 안전하고 공식적인 소통 채널 역할을 수행한다. 무분별한 접촉이나 기술 유출을 방지하고,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교류를 이끌어 나간다.
- 외계 기술의 평화적 활용: 코바치의 잔존 기술이나 앞으로 교류를 통해 얻게 될 외계 기술을 철저한 국제적 통제 하에 연구하고, 의료, 에너지, 환경 등 인류 전체의 복지를 위해 평화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릴리의 제안은 대담하고 혁신적이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에크릴이라는 공동의 위협과 릴리라는 초월적인 존재의 중재 아래, 인류는 마침내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UN 산하에 새로운 기구, ‘지구 양자 관리청(Terrestrial Quantum Authority, TQA)’이 창설되었고, 릴리는 그 최고 자문 위원 자리에 올랐다.
에크릴은 인류의 이러한 자정 노력을 침묵 속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약속대로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감시의 눈길은 여전히 지구를 떠나지 않았다. 인류가 스스로 설정한 규칙을 지키는지, 양자적 불안정성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지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완전 소거 프로토콜은 철회되었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면죄부는 아니었다. 인류는 여전히 시험대 위에 서 있었다.
엘라나의 마지막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물리적인 존재로 돌아올 수 없었지만, 그녀의 희생과 믿음은 릴리의 마음속에, 그리고 새롭게 구축되는 인류 시스템의 근간에 깊이 새겨졌다. 그녀는 인류와 아키텍트 사이의 꺼지지 않는 불씨이자, 미래를 향한 약속의 상징으로 남았다.
파괴의 상흔 위에서, 인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관측의 축은 피로 얼룩졌지만, 그 위에서 인류는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희망, 감시와 자율성, 인간과 초월적 존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새로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모든 것을 짊어진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소녀, 릴리 리브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