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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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6월 14일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승리의 환호는 없었다.

코바치의 펜트하우스는 처참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녹아내린 코바치의 흉측한 잔해와 경련하는 미라 웰스의 뒤틀린 시체가 끔찍한 전리품처럼 남아 있었다. 천장은 반쯤 무너져 내렸고, 통유리창은 산산조각 나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위태롭게 비추고 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릴리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와의 융합된 의식은 여전히 그녀 안에 살아 숨 쉬었지만, 그 무게는 버거웠다.

창밖의 세상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었던 핏빛 에너지 막은 완전히 사라졌고, 기괴하게 찢어졌던 차원 균열들은 상처가 아물 듯 흔적 없이 닫혔다. 도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최악의 위기가 지나갔음을 느끼고 있었다. 안도와 함께, 방금 겪었던 초현실적인 공포에 대한 질문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MI6의 잔존 병력과 국제 사회의 비밀 대응팀이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앞의 광경과 릴리의 존재에 경악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바로 그때, 희미한 빛의 입자들이 허공에 모여들며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엘라나였다. 그녀의 몸은 거의 반투명했고,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릴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릴리…” 엘라나의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희미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경외와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해냈군요… 당신이… 세상을 구했어요.”

릴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라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감사의 기색과 함께, 엘라나의 희미해져 가는 존재에 대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 다시 한번 거대한 의식의 파동이 지구 전체를 감쌌다. 에크릴. 이번에는 하늘을 찢는 현현이나 위협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산맥이 침묵 속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듯, 차갑고 절대적인 관리자의 의지가 그 자리에 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이전의 파괴적인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감정 없는 냉철한 평가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에크릴의 의식은 펜트하우스 폐허 속, 릴리와 엘라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릴리가 보여준 힘, 관측 상수를 비틀어 차원 융합을 막고 안정화 파동으로 균열을 닫아버린 경이로운 능력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안에 융합된 에단의 의식, 그 희생적인 선택의 의미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에크릴의 의지가 판단 결과를 내놓았다.

<분석 완료. 대상: 에단 리브스 의식과 융합한 릴리 리브스. 행성 지구의 양자적 혼란 상태 해소 및 시스템 안정성 회복 확인. 원인: 예측 불가능 변수인 릴리 리브스의 개입. 비록 규약 외적인 방식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시스템 위협 제거 목표 달성됨.>

그의 평가는 기계적이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변화의 가능성이 담겨 있었다.

<이에, 아키텍트로서 이전 결정 사항을 수정한다. 행성 지구(Terra-Sol-3)에 대한 ‘완전 소거’ 프로토콜을 공식적으로 철회한다.>

릴리와 엘라나는 숨을 삼켰다. 인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에크릴의 다음 메시지는 완전한 자유가 아님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잠재적 위험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완전한 자율성 부여는 불가하다. 대신, 아키텍트의 ‘관리 하의 자율성’을 부여한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인류는 외계 문명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우주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양자 능력과 기술을 개발할 자유도 주어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키텍트의 지속적인 감독과 필요시 개입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허용된다는 뜻이었다. 보이지 않는 목줄은 여전히 채워져 있는 셈이었다.

엘라나는 이 제안을 듣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결과였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릴리에게 정신적 속삭임을 보냈다.

<받아들여요, 릴리… 이것이… 인류가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당신이라면… 이끌 수 있어요… 새로운 시대를… 부디… 평화로운 미래를…>

엘라나의 의식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그녀는 릴리에게 인류와 자신의 종족 사이의 다리가 되어 달라는 마지막 염원을 남기고, 마침내 빛의 입자로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녀의 희생적인 선택과 마지막 증언은 그렇게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릴리는 엘라나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잠겼지만, 이내 굳은 결의로 바뀌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희생, 엘라나의 믿음,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지고 일어섰다.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허공의 에크릴 의식을 향해, 인간의 대표이자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서 응답했다.

“당신의 제안을… 인류의 이름으로 수락합니다.” 릴리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행성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파괴자가 아닌, 책임감 있는 우주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에크릴의 의식은 릴리의 대답을 인지했다는 듯 짧은 파동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갔다. 하늘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고, 끔찍했던 위협의 기운은 사라졌다.

펜트하우스 폐허 속, 릴리는 홀로 서 있었다. 주변으로는 MI6 요원들과 구조대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는 구원받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엘라나는 소멸했고, 아버지는 그녀 안에 융합되어 존재했다. 그리고 인류는 ‘관리 하의 자율성’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종말도 아니었다. 파동함수의 잔해 위에서, 피로 얼룩진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채, 릴리는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