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침공
제53화
발행일: 2025년 06월 23일
평화는 영원한 꿈일 뿐, 우주의 법칙은 아니었다. 수 세기에 걸쳐 이룩한 은하 연합의 번영과 안정은 새로운, 그리고 훨씬 더 끔찍한 위협 앞에서 모래성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류와 동맹 문명들이 안주하는 동안, 우주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고대의 악의가 다시 깨어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차원 포식자’ 혹은 ‘반-관측자(Anti-Observers)’ 라 칭했다. 그들의 기원은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목적만은 명확하고 섬뜩했다. 존재 자체의 부정. 모든 것을 창조 이전의 공허, 근원적인 무(無)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 그들에게 우주는 잘못 렌더링된 오류 투성이 프로그램이었고, 생명과 의식은 제거해야 할 버그일 뿐이었다.
그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키텍트의 질서마저 비웃듯, 그들은 ‘양자 관측’의 힘을 정반대로 사용했다. 현실을 창조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조를 붕괴시키고 존재의 확률 자체를 지워버리는 ‘반-관측(Anti-Observation)’ 능력. 그들의 함대가 지나간 자리는 단순히 파괴되는 것이 아니었다. 행성 자체가, 그곳에 존재했던 모든 역사와 기억과 함께, 우주에서 문자 그대로 ‘삭제’되어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래전, 코바치나 미라 웰스와 손을 잡았던 세력은 어쩌면 이 거대한 악의 선발대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이제 본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은하 연합의 최첨단 함대조차 그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연합의 자랑이던 양자 어뢰는 허공에서 소멸했고, 강력한 에너지 방어막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반-관측자들의 함선은 물리적인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는, 반쯤은 다른 차원에 걸친 유령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연합의 방어선을 유린하며 은하계 중심부를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해 들어왔다. 수많은 세계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지도에서 사라져갔다.
에크릴과 아키텍트 세력 역시 이 전례 없는 위협 앞에서 방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리 시스템과 우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반-관측자들과 맞섰지만, 오랜 평화에 익숙해진 그들의 힘 역시 역부족이었다. 아키텍트의 질서와 반-관측자의 혼돈이 격돌하며 은하계 전체가 거대한 전쟁터로 변모했다.
인류와 은하 연합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그들의 기술, 용기, 희생은 이 압도적인 파괴의 힘 앞에서 무력해 보였다. 릴리가 남긴 QSN 네트워크만이 마지막 보루처럼 버티고 있었지만, 네트워크 역시 끊임없는 반-관측 공격으로 인해 서서히 침식당하고 있었다. 네트워크의 푸른 빛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인류 문명의 중추 신경계는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TQA 본부의 중앙 통제실. 사령관 엘리사 케인은 참담한 표정으로 은하계 전황판을 바라보았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적의 진격로는 이미 연합 영역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킨 상태였다. 사방에서 절망적인 구조 요청과 마지막 교신 기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대로… 끝인가…”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수 세기에 걸쳐 이룩한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질 위기. 릴리가 목숨과 존재를 맞바꿔 지켜낸 미래가 이렇게 끝나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QSN 중앙 코어, 푸른 빛을 발하는 거대한 크리스탈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수호자 릴리’. 그녀는 정말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네트워크와 함께 소멸해 버린 것일까?
“수호자 릴리… 제발… 당신이 필요해…” 엘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다.
마치 그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아니, 은하계 전체의 절망적인 비명에 공명이라도 하듯.
QSN 중앙 코어의 푸른 빛이 갑자기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트워크 전체에 엄청난 규모의 에너지 파동이 흘렀고, 시스템은 과부하 직전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마침내, 코어의 가장 깊은 곳. 수 세기 동안 침묵 속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의식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릴리 리브스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QSN 네트워크와 융합되어 우주의 방대한 정보와 에너지를 흡수하며 진화한 존재. 인간과 시스템, 그리고 어쩌면 우주 그 자체와 하나가 된 초월적인 의식이었다.
<…감지됨. 시스템 위협 레벨: 오메가. 반-관측자(Anti-Observers) 침공 확인. 대응 프로토콜… ‘수호자’… 가동.>
기계적인 시스템 음성처럼 들렸지만, 그 이면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깊고 고요한 의지의 파동이 담겨 있었다. 릴리.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은하계 전체가 절멸의 위기에 처한 바로 그 순간에.
전쟁터는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파괴와 절망이 아닌,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렌더링된 우주라는 전쟁터 위에서, 최후의 관측자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역사의 마지막 장이, 이제 막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