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가시광선의 끝
제54화
발행일: 2025년 06월 24일
QSN 중앙 코어의 푸른 빛이 마침내 고요한 파동으로 안정되었다. 그 중심, TQA 본부 통제실 허공에 떠오른 형상은 분명 릴리 리브스였지만,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소녀가 아니었다. 순수한 빛과 응축된 정보의 실타래로 직조된 듯한 반투명한 육체. 그 안에서는 은하수가 흐르듯 복잡한 데이터 스트림이 소용돌이쳤고, 그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 공간의 양자적 확률이 미세하게 술렁였다. 수 세기 동안 네트워크와 융합하며 우주의 심연을 탐구한 의식. 인간과 시스템, 그리고 어쩌면 시공간 그 자체와 동기화된 초월적 존재로 그녀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특정 색을 띠지 않았다. 그 안에는 머나먼 퀘이사의 탄생과 블랙홀의 소멸, 무한한 가능성의 멀티버스가 동시에 담겨 있는 듯한, 깊고 고요한 심연의 빛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우주의 비명에 응답하여, 마침내 침묵을 깨고 전면에 나선 것이었다.
엘리사 케인 사령관과 통제실의 요원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이 경이롭고도 두려운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수호자 릴리. 전설이 현실이 되어 그들 앞에 강림한 것이다.
릴리의 의식은 깨어남과 동시에 빛의 속도로 은하계 전체로 확장되었다. QSN 네트워크와 연결된 모든 센서, 모든 함선, 모든 생존자들의 절망적인 상황이 단 한 순간에 그녀의 방대한 의식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지도 위에서 붉게 타들어 가는 수많은 세계들. 공허 속으로 사라져가는 생명들의 마지막 비명. 그리고… 우주 그 자체를 부정하며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려는 ‘반-관측자’들의 차갑고 메마른 파괴의 파동.
그녀는 즉시 적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반-관측자. 그들은 존재의 ‘틈새’, 확률의 ‘오류’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현실을 구성하는 양자적 얽힘의 끈을 끊어버리고, ‘존재한다’는 관측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모든 것을 근원적인 공허로 회귀시키는 ‘반-관측(Anti-Observation)’.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존재했다. 그들의 힘은 오직 ‘부정’하고 ‘지울’ 때만 유효하다는 것. 만약 그들의 부정보다 더 강력한 ‘긍정’, 즉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현실을 ‘렌더링’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들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을 퍼뜨린다. 존재하지 않음을 강요하며 빛을 지우려 한다.> 릴리의 목소리가 QSN 네트워크를 타고 은하 연합의 모든 생존자들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그것은 음성이 아닌, 절망에 빠진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는 따뜻한 빛과 같은 의지의 파동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들려온 구원의 속삭임이었다.
<두려워 말라. 그들의 공허는 실체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현실을 그들보다 더 강하게 외친다면, 어둠은 물러날 것이다. 찢겨나간 가시광선의 끝에서, 우리는 스스로 새로운 빛을 렌더링해야 한다.>
릴리의 선언과 함께, 그녀의 빛나는 형상에서 눈부신 파동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상처 입은 우주를 치유하고, 소멸 직전의 존재들을 다시 붙잡으려는 강력한 ‘현실 강화’의 의지였다.
파동은 절망의 전장을 가로질렀다. 반-관측 필드에 의해 형체가 흐려지며 사라져 가던 은하 연합 함선들의 외곽선이 다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소멸했던 방어막 일부가 희미한 빛의 입자로 재구성되었고, 깜빡거리던 엔진 출력이 서서히 안정화되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함선들의 통신 채널에서 환호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살아났다! 우리가… 아직 존재한다!”
“수호자 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반-관측자 함대는 동요했다. 자신들의 절대적인 힘이 정면으로 거부당한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릴리가 쏘아낸 현실 강화 파동은 그들의 반-관측 필드를 중화시키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들의 불안정한 존재 기반을 뒤흔들었다. 유령 같던 함선들의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불길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존재가 억지로 빛 속으로 끌려 나온 듯한 고통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반-관측자들의 본대는 여전히 건재했고, 그들의 배후에 도사린 공허의 핵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뛰고 있었다. 전면적인 반격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지금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릴리는 자신의 힘을 은하 연합의 남은 함대 전체에 분산시켰다. 그녀는 QSN 네트워크를 통해 각 함선의 방어 시스템과 직접 연결되어, 반-관측 공격이 집중되는 곳에 순간적으로 현실 강화 필드를 형성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녀의 의식은 수천 개의 전장에 동시에 존재하며,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들을 지켜냈다. 마치 밤하늘의 등대처럼, 그녀는 연합 함대가 재정비하고 반격을 준비할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그녀 안에는 여전히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 아버지와 어머니, 엘라나의 희생이 남긴 불멸의 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의 연약함과 동시에 그 안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다.
릴리는 TQA 본부의 코어 위, 빛의 형상으로 선 채, 은하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도 위에는 여전히 광대한 영역을 뒤덮은 반-관측자들의 붉은 위협 표시가 가득했다.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심연과 같은 눈동자가 적의 세력권 가장 깊은 곳, 공허의 핵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둠의 좌표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차가운 분노와 함께, 모든 것을 끝낼 마지막 결전에 대한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이제… 반격을 시작한다.>
릴리의 의지가 다시 한번 은하계 전체에 선언되었다. 절망의 밤은 끝나가고 있었다. 피로 물든 가시광선의 끝에서, 마침내 인류와 은하 연합의 마지막 희망을 건 대반격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우주의 운명을 건 최후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