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팅겐의 찬사, 뒤늦은 인정
제39화
발행일: 2025년 07월 10일
칸토르의 건강이 쇠약해지고 그의 학문적 활동이 점차 뜸해질 무렵,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론은 수학계의 중심부로 서서히 편입되기 시작했다. 한때 이단시되거나 무시당했던 그의 아이디어들은 이제 젊은 세대 수학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그의 집합론은 현대 수학의 필수적인 언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수학의 메카’로 불리던 독일 괴팅겐 대학이 있었다.
괴팅겐 대학은 가우스, 리만, 디리클레와 같은 전설적인 수학자들을 배출한 곳으로, 당시 세계 수학 연구를 선도하는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칸토르 이론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 중 한 명인 다비트 힐베르트가 있었다. 힐베르트의 명성과 영향력은 칸토르의 이론이 학계의 인정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힐베르트는 칸토르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집합론이 가진 혁명적인 가치를 끊임없이 역설했다. 그는 자신의 강의와 저술을 통해 칸토르의 아이디어들을 소개했고, 젊은 수학자들이 이 새로운 분야를 탐구하도록 격려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괴팅겐은 칸토르 집합론 연구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1900년대 초반, 칸토르의 나이가 예순에 가까워질 무렵, 괴팅겐 대학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특별한 행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것은 칸토르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그의 공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자리였다. 한평생 학계의 냉대와 몰이해 속에서 고독한 싸움을 벌여왔던 칸토르에게는 너무나 뒤늦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격적인 순간이 될 터였다.
이 행사는 힐베르트를 비롯한 괴팅겐의 수학자들이 주도하여 추진되었다. 그들은 칸토르가 겪었던 부당한 대우와 그의 이론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특히 칸토르가 평생 동안 시달렸던 크로네커의 망령에서 벗어나, 그의 업적을 공정하게 평가받을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칸토르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다. 그의 건강은 이미 너무 악화되어 장거리 여행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할레의 요양원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평생을 바친 연구가 마침내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기쁨과 동시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 늦어버린 인정에 대한 허탈함과 아쉬움도 느꼈을지 모른다.
비록 칸토르 자신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괴팅겐에서의 행사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힐베르트는 칸토르의 업적을 찬양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고, 참석한 많은 수학자들은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박수를 보냈다. 칸토르의 이름은 더 이상 논란과 오해의 대상이 아니라, 수학의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선구자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이 괴팅겐에서의 뒤늦은 인정은 칸토르 개인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겠지만,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그의 병은 깊어졌고, 그의 정신은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풀리지 않는 문제들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칸토르의 이론이 마침내 학계의 주류로 편입되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그의 집합론은 이제 수학의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는 기본적인 언어이자 도구가 되었고, 그가 제기했던 문제들은 다음 세대 수학자들에게 끝없는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칸토르가 열었던 무한의 문은 더 이상 소수의 탐험가들만이 드나드는 비밀스러운 통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모든 수학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넓고 잘 닦인 대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록 그 길을 처음 열었던 개척자는 지치고 병들어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영원히 빛날 것이었다.
괴팅겐의 찬사는 칸토르에게 주어진 마지막 월계관과도 같았다. 그것은 그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작은 보상이자, 그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역사의 정당한 평가였다. 비록 그 월계관을 직접 쓰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수학의 역사에 영원히 새겨져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될 터였다. 그의 육신은 스러져갈지라도, 그의 정신은 그가 창조한 무한의 낙원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