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노이만의 관심

212025년 08월 12일4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의 오후 티타임은 단순한 휴식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격식 없이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지적 교류의 장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소파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괴델이 조용히 구석에서 찻잔을 들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날의 화두는 앨런 튜링의 ‘보편 기계’였다.
존 폰 노이만은 튜링의 옆에 앉아, 마치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기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부분은 말이야, 프로그램과 데이터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점일세.”

주변에 있던 몇몇 수학자들이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폰 노이만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자네의 보편 기계는 테이프에 쓰인 ‘규칙(프로그램)’을 먼저 읽고, 그 규칙에 따라 테이프의 다른 부분에 있는 ‘숫자(데이터)’를 처리하지. 하지만 그 규칙 자체도 결국 숫자의 나열 아닌가? 프로그램이 곧 데이터가 되는 거야.”

튜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디어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폰 노이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것을 실제 기계로 만든다고 상상해보게. 우리는 더 이상 덧셈 기계, 곱셈 기계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네. 단 하나의 ‘범용 하드웨어’만 만들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 기계에 덧셈 프로그램을 주면 덧셈기가 되고, 탄도 계산 프로그램을 주면 탄도 계산기가 되는 거지.”

폰 노이만의 눈이 빛났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진공관과 계전기가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메모리’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프로그램의 명령어와 처리할 데이터를 구분 없이 저장하는 걸세. 기계는 그냥 순서대로 메모리에서 명령어와 데이터를 가져와 처리하면 돼. 이것을 ‘저장-프로그램 방식(Stored-Program Concept)’이라고 부를 수 있겠군.”

이 순간, 현대 컴퓨터의 근간을 이루는 ‘폰 노이만 구조(von Neumann architecture)’의 핵심 아이디어가 튜링과의 대화 속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튜링은 폰 노이만의 통찰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자신은 ‘계산’의 논리적 한계를 증명하기 위해 기계를 상상했지만, 이 헝가리 천재는 그 상상 속의 기계를 현실로 끌어내어 인류의 도구로 만들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폰 노이만은 튜링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튜링이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자신의 연구 조교로 프린스턴에 남아주기를 원했다. 당시 폰 노이만의 조교 자리는 젊은 과학자들에게는 꿈의 자리였다. 연봉도 1,500달러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튜링 군, 나와 함께 일하지 않겠나? 우리가 함께라면, 자네의 그 논리 기계를 실제로 만들어 볼 수 있을 걸세.”

그것은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세계 최고의 지성과 함께, 자신의 이론을 현실로 구현할 기회였다. 프린스턴의 자유로운 학문적 분위기와 풍족한 지원은 케임브리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튜링은 며칠 밤을 고민했다.
미국에 남는다는 것은 안정된 미래와 무한한 연구 가능성을 의미했다. 그의 괴짜 같은 성격도 이곳에서는 큰 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안개 낀 영국과 케임브리지의 강변이 아른거렸다. 그는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남아 있었다.

‘기계는 계산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탐구는, 결국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느꼈다. 폰 노이만이 실용적인 ‘계산 기계’에 집중하는 동안, 자신은 더 근원적인 ‘생각하는 기계’의 가능성을 파고들고 싶었다.

결국 튜링은 폰 노이만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하지만 저는 영국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폰 노이만은 아쉬워했지만,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는 튜링이라는 젊은 천재의 고집스러운 눈빛에서, 자신이 상상하는 것과는 또 다른, 더 거대한 꿈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튜링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결정이, 그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을지를. 그리고 그가 거절한 폰 노이만과의 협력이, 훗날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어지게 될 것임을. 그의 발걸음은 이제 평화로운 학문의 전당을 떠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소용돌이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