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링의 제안은 블레츨리 파크의 수뇌부를 설득했지만,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는 즉시 허트 8의 동료 수학자 고든 웰치먼(Gordon Welchman)과 함께 새로운 기계의 구체적인 설계에 착수했다.
그들의 작업 공간은 설계도와 회로도, 그리고 수많은 계산으로 뒤덮였다. 튜링이 제시한 핵심 아이디어는 ‘논리적 모순을 통한 후보 제거’였지만, 이것을 전기 기계 회로로 구현하는 것은 극도로 복잡한 작업이었다.
기계의 심장은 ‘드럼(drum)’이라 불리는 장치였다. 각 드럼은 에니그마의 회전자와 똑같은 내부 배선을 가지고 있었다. 튜링은 한 번에 여러 개의 가설을 동시에 검증하기 위해, 이 드럼들을 병렬로 연결하는 구조를 구상했다. 기계 한 대에 약 36개의 에니그마 회전자를 시뮬레이션하는 드럼이 탑재될 예정이었다.
설계의 핵심은 튜링이 고안한 ‘전기적 논리 회로’였다.
가령 ‘크립’ 분석을 통해 ‘E를 입력하면 Q가 나와야 한다’는 가설이 세워졌다고 하자. 기계는 특정 회전자 설정에서 실제로 E를 입력했을 때, 출력으로 Q가 나오는지 검사한다. 만약 Q가 나온다면 전류는 계속 흐른다. 하지만 만약 다른 글자(예: X)가 나온다면, 회로는 즉시 모순을 감지하고 해당 가설을 기각한다.
튜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고든 웰치먼의 중요한 개선안을 받아들여 ‘대각선 보드(Diagonal Board)’라는 장치를 추가했다. 이 장치는 ‘만약 E가 Q로 암호화된다면, Q 역시 E로 암호화된다’는 에니그마의 대칭적 특성을 회로에 반영한 것이었다. 이 개선 덕분에, 하나의 논리적 연결이 확인되면 그와 관련된 다른 수많은 가능성들이 연쇄적으로 검증되거나 기각될 수 있었다. 기계의 효율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튜링은 이 기계에 ‘봄브(Bombe)’라는 이름을 붙였다. 폴란드의 초기 해독 기계 ‘봄바’에 대한 존경의 의미이기도 했고,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동하는 모습이 마치 시한폭탄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설계는 거의 완성되었지만, 제작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 거대한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백 킬로미터의 전선, 수천 개의 계전기, 그리고 수백 개의 정교한 드럼이 필요했다. 전쟁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것은 엄청난 예산과 자원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였다.
블레츨리 파크의 행정 책임자들은 회의적이었다.
“튜링 씨, 당신의 이론은 훌륭하지만, 이건 너무 도박에 가깝소. 이 기계가 실패하면, 이 모든 자원은 그냥 고철 더미가 되는 거요.”
“전시에 이런 불확실한 프로젝트에 그만한 예산을 투입할 수는 없소.”
튜링은 답답했다. 그의 눈에는 성공이 명확하게 보였지만, 관료들의 눈에는 위험 부담만 보였다. 그는 서류 작업이나 행정 절차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기계는… 작동합니다. 제 계산으로는… 틀림없습니다.”
그의 더듬거리는 말투는 관료들에게 확신보다는 불안감을 주었다.
프로젝트는 지지부진했다. 시제품 제작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필요한 부품과 인력은 제때 공급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대서양에서는 매일같이 배들이 가라앉고 있었다. U-보트의 울프팩(Wolfpack) 전술은 연합군 수송선단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튜링은 책상에 앉아 타들어 가는 속을 애써 억눌렀다. 칠판 위에서의 논리 싸움은 끝났지만, 이제는 관료주의와 예산이라는 더 거대한 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창밖의 어둠을 보았다. 저 너머 대서양의 차가운 바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들을 구할 방법이 있는데,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고독한 천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것은 더 이상 학문적 명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전쟁의 승패와 수백만 명의 목...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 그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이 벽을 뚫어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