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가을, 블레츨리 파크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튜링과 그의 팀이 설계한 ‘봄브(Bombe)’의 시제품, ‘빅토리(Victory)’는 제작되었지만, 그 성능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속도가 너무 느렸고,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더 많은 봄브를 제작하고 성능을 개선하기 위한 예산 요청은 번번이 관료주의의 벽에 막혔다.
지휘관 데니스턴은 전쟁성의 예산 담당자들과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증명되지 않은 기계에 더 이상의 투자는 곤란하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 사이 U-보트의 위협은 극에 달했다. 영국의 식량 재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가들은 매일 밤샘 작업을 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절망감과 피로가 허트 8 전체를 짓눌렀다.
튜링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정상적인 절차로는 이 교착 상태를 뚫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극약 처방이 필요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허트 8과 허트 6의 핵심 인물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조용히 불러 모았다. 당대 최고의 체스 챔피언이자 해독팀의 리더인 휴 알렉산더, 동료 수학자 고든 웰치먼, 그리고 또 다른 핵심 해독가 스튜어트 밀너-배리.
튜링은 평소의 더듬거리는 모습과 달리, 단호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규칙을 깨야 합니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우리의 요청은 중간에서 모두 막히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목소리를 이 나라의 가장 높은 곳에 직접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가장 높은 곳이라니… 설마?” 밀너-배리가 물었다.
튜링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수상. 윈스턴 처칠 수상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회의실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개 암호 해독가들이 지휘 체계를 모두 무시하고 국가 최고 지도자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것은,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는 중대한 항명 행위였다.
휴 알렉산더가 신중하게 말했다.
“앨런, 그건 너무 위험해. 우리 모두의 경력이 끝장날 수도 있어.”
“경력이 문제입니까?” 튜링이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지금 밖에서는 매일 수백 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봄브가 수십 대만 더 있다면, 저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류 작업 때문에, 관료들의 무관심 때문에 손을 놓고 있어야 합니까?”
그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튜링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봄브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결국, 그들은 튜링의 위험한 제안에 동의했다. 네 명의 이름으로, 처칠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편지는 블레츨리 파크의 절박한 상황을 가감 없이 담았다.
“수상 각하, 저희는 현재 독일 해군 암호 해독 작업이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저희가 요청하는 자원이 부족하여 작업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저희는 더 많은 인력과, 무엇보다도 더 많은 ‘봄브’ 기계가 필요합니다…”
편지는 독일군의 암호 해독이 전쟁의 승패에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역설하며, 즉각적인 조치를 호소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저희는 패배주의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희가 가진 기회를 놓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1940년 10월 21일, 네 명의 서명이 담긴 이 편지는 공식적인 경로가 아닌, 밀너-배리의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수상 비서실에 직접 전달되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들의 운명은 이제 윈스턴 처칠 단 한 사람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그들의 호소는 묵살될 것인가, 아니면 역사를 바꿀 기적을 만들어낼 것인가. 허트 8의 네 명의 천재는 초조하게, 운명의 답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