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링의 봄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블레츨리 파크는 연합군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들이 해독해낸 정보, 코드명 ‘울트라(Ultra)’는 전쟁의 모든 국면에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서양 전투:
가장 극적인 변화는 대서양에서 일어났다. 봄브가 U-보트의 위치를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해내면서, 연합군은 더 이상 눈을 감고 싸우지 않았다.
수송선단은 U-보트의 ‘울프팩’이 매복한 해역을 미리 알고 안전하게 우회했다. 때로는 역으로 호위 구축함들이 U-보트 예상 출몰 지역으로 파견되어 사냥에 나섰다. U-보트 격침률은 급격히 치솟았고, 독일 해군 사령관 칼 되니츠 제독은 자신의 통신이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적들이 우리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영국의 생명줄이었던 대서양 보급로는 안전해졌고, 이는 훗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물자를 비축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의 명장,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단은 연합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보급이었다. 블레츨리 파크는 롬멜의 군단으로 향하는 보급선의 항로와 출항 시간을 정확히 해독해냈다.
이 정보는 지중해의 영국 공군과 해군에게 전달되었다. 연합군 폭격기와 잠수함은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독일 보급선들을 귀신같이 찾아내 격침시켰다. 롬멜의 전차들은 연료와 부품 부족으로 사막 한가운데서 멈춰 서기 일쑤였다. 결국 롬멜은 보급 문제로 발목이 잡혔고, 이는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울트라의 딜레마:
하지만 울트라 정보는 양날의 검이었다. 정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에게 노출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만약 독일군이 암호 체계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면, 블레츨리 파크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윈스턴 처칠과 정보 당국은 극도의 신중함을 기했다. 울트라 정보를 통해 얻은 승리라 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경로로 정보를 얻은 것처럼 위장해야 했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의 적군 위치를 파악했더라도, 공격 전에 반드시 정찰기를 먼저 띄워 ‘정찰기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때로는 더 끔찍한 결정도 내려야 했다. 명백히 공격을 예측하고도, 울트라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군 일부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비정한 선택의 순간들도 있었다.
튜링의 역할:
앨런 튜링은 이 거대한 정보 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 설계자가 아니었다. 그는 허트 8의 수석 과학 컨설턴트로서, 독일 해군의 새로운 암호 기술 변화에 대응하는 책임을 맡았다.
독일군이 에니그마에 네 번째 회전자를 추가하자, 그는 즉시 봄브를 개량하여 이에 대응했다. 암호 운용 절차가 바뀔 때마다, 그는 그 허점을 파고드는 새로운 통계적 기법과 해독 방법론을 개발해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순수 수학의 세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의 노트 위에서 펼쳐지는 방정식과 알고리즘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와 사막에서 수십만 병사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가 1936년, 케임브리지의 조용한 연구실에서 잉태했던 ‘계산 가능성’에 대한 순수한 이론.
그 추상적인 개념이 이제 거대한 강철 기계의 형태를 빌려,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튜링은 자신의 이론이 가진 무서운 위력을 실감하며, 매일같이 피와 철의 냄새가 나는 정보들과 씨름했다. 전쟁은 그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가장 현실적이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