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압박이 극에 달하던 블레츨리 파크에서, 튜링은 자신과 지적으로 동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조앤 클라크(Joan Clarke)였다.
조앤은 케임브리지 뉴넘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한 수재였다. 그녀는 지도 교수의 추천으로 블레츨리 파크에 징집되었지만, 처음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서류 작업이나 처리하는 단순 사무직(Clerical grade)으로 배정받았다. 급여도 남성 동료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비범한 분석 능력은 곧바로 튜링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허트 8로 자리를 옮겨, 튜링과 함께 가장 어려운 독일 해군 암호 해독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다.
조앤은 튜링의 사회적 서투름이나 괴짜 같은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그의 어눌한 말투 너머에 있는 명석한 논리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꿰뚫어 보았다. 튜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앤을 성별이 아니라, 동등한 지성을 가진 동료이자 파트너로 대했다.
그들의 사무실은 칠판과 종이, 그리고 끝없는 토론으로 가득 찼다.
“앨런, 이 부분의 확률 분포가 이상해요. 독일 암호병들이 특정 키 조합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조앤, 당신 말이 맞소. 이걸 통계적으로 분석해서 봄브 메뉴를 최적화할 수 있겠어.”
그들은 함께 웃고, 함께 좌절했으며,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튜링은 조앤 앞에서만큼은 긴장을 풀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 조앤은 마치 크리스토퍼 모컴 이후 처음으로 찾은, 진정한 지적 동반자였다.
어느 날, 튜링은 조앤에게 불쑥 청혼했다.
그것은 열정적인 사랑 고백이라기보다는, 지적인 파트너십을 평생 이어가고 싶다는 제안에 가까웠다. 조앤은 기쁘게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며칠 뒤, 튜링은 조앤을 따로 불러내어 어려운 고백을 해야만 했다.
“조앤… 내가 당신에게 숨긴 것이 있소.”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당시 동성애는 영국에서 중범죄로 취급되었고, 사회적으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앤은 잠시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어요, 앨런. 하지만 그게 우리 관계에 무슨 문제가 되나요?”
그녀는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의 관계는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깊은 우정과 지적인 연결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약혼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함께 튜링의 가족을 만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튜링은 조앤에게 암호로 된 사랑의 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튜링은 깊은 죄책감과 혼란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조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느꼈다. 사회의 시선과 법률 앞에서, 그들의 결혼 생활이 평탄치 않을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를 불행한 삶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몇 달 후 튜링은 조앤에게 파혼을 통보했다.
“미안하오, 조앤. 이 결혼은… 잘못된 것 같소.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될 거야.”
조앤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해주었다.
그들의 약혼은 끝났지만, 우정과 파트너십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허트 8에서 가장 신뢰하는 동료로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함께 일했다. 조앤 클라크는 튜링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고도 그의 곁을 지켜준, 그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진정한 친구였다.
이 짧았던 약혼은 튜링의 내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사회가 그어놓은 ‘정상’의 범주에 속할 수 없다는 깊은 고독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갈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전쟁의 소음 속에서, 암호 해독이라는 거대한 과제 뒤편에서, 앨런 튜링이라는 한 인간의 고독한 내면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