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강력한 적, 로렌츠

332025년 08월 18일4

1942년, 블레츨리 파크의 해독가들은 에니그마와의 싸움에서 점차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튜링의 봄브는 독일 해군 암호를 꾸준히 격파했고, 대서양의 전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감청 부대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암호 전문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에니그마와는 완전히 달랐다. 에니그마 암호문은 모스 부호를 통해 인간이 직접 송수신하는 방식이었지만, 이 새로운 암호는 무선 전신 타자기(Teleprinter)를 통해 기계가 자동으로 송수신하는 방식이었다.

전문은 0과 1의 이진 코드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패턴은 에니그마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무작위적으로 보였다.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 분석가들은 이 새로운 암호 체계에 ‘튜니(Tunny, 참치)’라는 코드명을 붙였다.

이 암호는 베를린과 유럽 각지의 독일군 최고 사령부 사이에서, 히틀러를 포함한 최상위 지휘관들의 전략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만약 이것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연합군은 적의 두뇌 속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문제는 튜니가 에니그마보다 한 수 위의 괴물이라는 점이었다.
수학자 빌 터트(Bill Tutte)를 비롯한 분석가들은 끈질긴 통계적 분석 끝에, 이 암호가 ‘로렌츠(Lorenz) SZ40/42’라는 기계에 의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로렌츠는 에니그마처럼 회전자(rotor)를 사용했지만, 그 규모와 복잡성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에니그마가 3~4개의 회전자를 사용하는 반면, 로렌츠는 무려 12개의 회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각 회전자의 핀 개수도 제각각 달랐고, 이 회전자들은 두 개의 복잡한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이 기계가 만들어내는 암호의 주기(period)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었다. 에니그마의 경우의 수가 천문학적이었다면, 로렌츠의 경우의 수는 그야말로 우주적이었다.

튜링의 봄브는 이 새로운 적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봄브는 에니그마의 구조적 특성(특히 크립의 루프 구조)을 공략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로렌츠에게는 적용할 수 없었다.

블레츨리 파크는 다시 한번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해독 작업은 극도로 더디게 진행되었다. 로렌츠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12개 회전자의 초기 위치를 알아내야 했는데,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간혹 독일 암호병의 실수(같은 메시지를 다른 키로 두 번 보내는 등) 덕분에 극소수의 메시지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전적으로 운에 기댄 방식이었다.

이 과정을 자동화하기 위해, 맥스 뉴먼(튜링의 옛 지도 교수)이 이끄는 팀은 ‘히스 로빈슨(Heath Robinson)’이라는 이름의 기계를 개발했다. 이 기계는 두 개의 종이테이프를 고속으로 돌리며 통계적 연관성을 찾는 방식으로, 로렌츠 암호 해독의 일부 과정을 자동화했다.

하지만 히스 로빈슨은 한계가 명확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두 개의 종이테이프는 동기화가 자주 어긋났고, 찢어지기 일쑤였다. 신뢰성이 너무 낮았고 속도도 충분치 않았다.

튜링은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허트 8의 업무를 총괄하면서도, 뉴먼의 팀이 겪는 어려움을 지켜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시 한번,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더 빠르고, 더 유연한 기계가 필요하다.’

히스 로빈슨처럼 특정 작업에만 묶여 있는 기계가 아니라, 다양한 논리적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 종이테이프의 물리적 한계에서 벗어나, 전자 회로의 속도로 작동하는 기계.

그의 머릿속에는 1936년에 구상했던 ‘보편 기계’의 개념이 다시 맴돌기 시작했다.
규칙(프로그램) 자체를 데이터처럼 읽어서, 어떤 계산이든 수행할 수 있는 기계.

한편, 우체국 연구소에서 파견된 한 조용한 통신 엔지니어, 토미 플라워스(Tommy Flowers)는 뉴먼의 팀이 종이테이프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종이테이프를 없애버리면 어떨까? 기계적인 부품 대신, 수천 개의 진공관(vacuum tube)을 사용해서 전자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

당시 진공관은 신뢰성이 낮아 자주 고장 나는 부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수천 개의 진공관을 쓴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플라워스는 확신이 있었다. 진공관은 껐다 켤 때 충격으로 고장 나는 것이지, 일단 켜두면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블레츨리 파크의 가장 어려운 도전 과제 앞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개의 아이디어가 무르익고 있었다.
튜링의 ‘프로그램 가능한 보편 기계’라는 이론적 개념과, 플라워스의 ‘진공관을 이용한 전자식 계산’이라는 공학적 해법.

이 두 아이디어가 만나는 순간,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블 전자 컴퓨터, ‘콜로서스(Colossus)’의 탄생이 임박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