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서스, 최초의 프로그래머블 컴퓨터

342025년 08월 18일4

토미 플라워스의 제안은 블레츨리 파크의 위원회에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진공관을 1,500개나 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 기계는 제대로 작동하는 시간보다 수리하는 시간이 더 길 거요.”
“신뢰할 수 없는 부품으로 그런 거대한 기계를 만드는 것은 예산 낭비일 뿐입니다.”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당시 가장 복잡한 전자 장비도 진공관을 100~200개 정도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플라워스의 구상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플라워스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우체국 연구소에서 수년간 진공관을 다루며 얻은 확신이 있었다. 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자, 그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 사비와 우체국 연구소의 자원을 동원해서라도 만들겠습니다.”

그의 확신에 감명받은 맥스 뉴먼과 블레츨리 파크의 일부 책임자들이 그를 지지했다. 결국, 플라워스는 제한된 지원을 받아 기계 제작에 착수했다. 그의 팀은 런던의 우체국 연구소에서 11개월 동안 밤낮없이 기계 제작에 매달렸다.

1943년 12월, 마침내 그 거대한 기계가 완성되어 부품별로 해체된 채 트럭에 실려 블레츨리 파크에 도착했다. 기계의 이름은 ‘콜로서스(Colossus, 거상)’였다. 그 이름에 걸맞게, 기계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거대했다.

콜로서스는 높이 2.3미터, 너비 4.9미터의 강철 프레임에 1,500개의 진공관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기계가 작동하자, 진공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실내 온도가 훈훈해졌다.

콜로서스의 작동 방식은 혁명적이었다.
히스 로빈슨처럼 두 개의 종이테이프를 쓰는 대신, 암호문이 담긴 하나의 종이테이프만을 고속으로 읽었다. 초당 5,000자의 경이로운 속도였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다른 하나의 테이프에 담겨 있던 ‘비교 패턴’을 진공관으로 구성된 전자 회로가 내부적으로 생성한다는 점이었다. 즉, 로렌츠 기계의 12개 회전자의 움직임을 콜로서스가 전자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콜로서스가 ‘프로그래머블(programmable)’하다고 불리는 이유였다.
작업자는 기계 전면의 수많은 스위치와 플러그를 조작하여, 기계가 수행할 논리 연산(AND, OR, XOR 등)의 종류와 순서를 변경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실상 기계에게 다른 ‘프로그램’을 지시하는 것과 같았다. 로렌츠 암호의 통계적 특성을 분석하는 다양한 알고리즘을, 하드웨어를 바꾸지 않고 스위치 조작만으로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튜링은 콜로서스가 조립되고 테스트되는 과정을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았다.
그의 눈에 콜로서스는 단순한 암호 해독기를 넘어선 존재였다.

‘저것은… 내 보편 기계의 그림자다.’

물론 콜로서스는 완벽한 의미의 ‘보편 튜링 기계’는 아니었다. 프로그램이 테이프가 아닌 스위치로 입력되었고, 수행할 수 있는 작업도 로렌츠 암호 해독에 특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핵심 원리는 튜링의 이론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1. 데이터를 전자적으로 고속 처리한다.
  2. 수행할 논리적 절차(프로그램)를 외부에서 변경할 수 있다.

튜링은 플라워스와 그의 팀이 이뤄낸 공학적 성취에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이론가가 아니라 실용적인 엔지니어였지만, 전쟁이라는 극한의 필요성 속에서 컴퓨터 과학의 미래를 현실로 구현해낸 것이다.

1944년 2월, 콜로서스는 첫 번째 실전 테스트에 투입되었다.
이전 같으면 수 주일이 걸렸을 로렌츠 암호의 키 세팅 분석 작업을, 콜로서스는 단 몇 시간 만에 끝마쳐 버렸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연합군은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이 나누는 가장 내밀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보들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인류 역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독일군의 방어 계획, 병력 배치, 방해 공작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파악함으로써 수만 명의 연합군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튜링의 ‘봄브’가 대서양을 구했다면, 플라워스의 ‘콜로서스’는 유럽 대륙을 해방하는 길을 열었다.
블레츨리 파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튜링의 이론적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은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블 전자 컴퓨터가 조용히, 그러나 위대하게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