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끝, 그리고 침묵의 시작

352025년 08월 19일4

1945년 5월 8일, 유럽 전역에서 마침내 총성이 멎었다.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 소식이 라디오를 통해 블레츨리 파크에도 전해졌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샴페인이 터졌고, 저택의 정원에서는 즉석 파티가 열렸다. 지난 6년간의 끔찍한 전쟁, 그 기나긴 터널의 끝이었다.

앨런 튜링은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보다는 깊은 피로감과 허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이곳에 쏟아부었다. 그의 이론, 그의 시간, 그의 정신.

전쟁이 끝난 직후, 블레츨리 파크에는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것은 승리에 대한 포상이나 훈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침묵’에 대한 명령이었다.

“블레츨리 파크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 여러분이 수행한 모든 작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영국의 최고 국가 기밀(Official Secrets Act)에 해당한다. 오늘 이후로, 이곳에서의 경험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이 명령을 어길 시에는 반역죄에 준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지휘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냉전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자신들이 가진 압도적인 암호 해독 능력을 미래의 적들에게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블레츨리 파크의 신화는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져야만 했다.

며칠에 걸쳐, 블레츨리 파크의 모든 것을 지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수십만 건의 해독 문서, 설계도, 메모, 보고서들이 소각로에 던져져 잿더미로 변했다.

튜링은 자신의 손으로 설계한 ‘봄브’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콜로서스’가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엔지니어들은 기계를 조립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기계를 분해했다. 망치와 렌치가 거대한 기계들을 고철 덩어리로 바꾸어 놓았다.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가, 가장 완벽하게 파괴되는 역설적인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일했던 수천 명의 천재들은 이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전쟁을 2년 이상 단축시키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한 영웅들이었지만, 그 사실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다. 그들의 업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었다.

튜링도 블레츨리 파크를 떠났다.
그의 손에는 낡은 가방 하나뿐이었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 중 한 명이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공허함뿐이었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전쟁 전, 그는 학문적 고독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탐구했다. 전쟁 중, 그는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세상과 분리된 섬이 되었다.

그가 가진 지식은 너무나 위험하고 거대했다. 그는 인류가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컴퓨터’라는 신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지식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튜링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았다. 평화를 만끽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저 멀리 시골 저택에서 밤을 새운 이름 없는 수학자들과 그들이 만든 기계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튜링의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질문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기계가 ‘계산’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그 힘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평생을 바쳐 답을 찾고자 했던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갈 시간이 아닐까.

크리스토퍼가 남긴 질문.
‘정신이란 무엇인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은 끝났다.
하지만 튜링의 머릿속에서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 또 다른 폭풍이 조용히 잉태되고 있었다. 그의 인생 2부 ‘기계의 증명’이 막을 내리고, 이제 마지막 3부 ‘기계, 생각할 수 있는가?’가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