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전쟁터, 맨체스터

362025년 08월 19일3

전쟁이 끝난 런던은 소란스러웠지만, 앨런 튜링의 내면은 고요했다. 아니, 고요하다 못해 공허했다. 블레츨리 파크의 긴박감, 매일같이 쏟아지던 암호문, 동료들과의 격렬한 토론.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은 무채색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제 민간인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 담긴 지식은 여전히 1급 기밀이었다. 그는 인류가 곧 맞이할 ‘컴퓨터 시대’의 청사진을 보았지만,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는 벙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런던 근교에 위치한 국립물리연구소(National Physical Laboratory, NPL)에서 그에게 공식적으로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NPL은 영국 최고의 과학 연구 기관 중 하나였다.

“튜링 박사, 우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자식 계산 기계’를 만들려고 하네. 당신의 이론적 배경이 이 프로젝트에 반드시 필요하오.”

NPL의 수학부장 존 워머슬리가 말했다.
튜링의 눈이 빛났다.
이것은 그가 기다려온 기회였다. 블레츨리 파크에서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졌던 ‘봄브’나 ‘콜로서스’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의 ‘보편 기계’ 이론에 입각한, 제대로 된 범용 컴퓨터를 만들 기회.

튜링은 제안을 수락했다. 그의 새로운 전쟁터는 이제 독일군 참모본부가 아니라, 국립물리연구소의 깨끗한 연구실이 되었다.

프로젝트에 착수한 튜링의 목표는 처음부터 동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NPL의 다른 과학자들은 새로운 기계를 ‘거대한 계산기’ 정도로 생각했다. 탄도 궤도를 계산하고, 복잡한 공학 문제를 푸는 초고속 슬라이드 룰.

하지만 튜링의 비전은 달랐다.
그는 NPL의 동료들에게 선언했다.

“우리가 만들 것은 단순히 계산만 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두뇌(Brain)’를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튜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이 기계가 계산뿐만 아니라, 체스를 두고, 작곡을 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의 말은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몽상가의 허언처럼 들렸다. 전쟁은 끝났고, 이제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연구가 필요한 때였다. 하지만 튜링은 확고했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전쟁 무기가 아닌, 인간의 지능을 탐구할 기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크리스토퍼의 죽음 이후 그가 평생을 바쳐 답하고자 했던 질문, ‘정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줄 유일한 도구였다.

그는 자신이 설계할 컴퓨터에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 자동 계산 엔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 자체에 그의 야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전쟁터는 블레츨리 파크와는 전혀 달랐다.
블레츨리 파크의 긴박함은 사라졌다. ‘오늘 당장 처리하라’는 처칠의 메모 대신, 이제는 예산 신청서와 주간 보고서, 그리고 끝없는 위원회 회의가 그의 책상을 채웠다.

그의 시대를 앞서간 비전은 느리고 신중한 관료주의의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그의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행정가들은 그의 설계가 너무 복잡하고 야심 차다고 생각했다.

튜링은 깨달았다.
전쟁터의 적은 눈에 보였지만, 평화로운 연구실의 적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편견, 무지, 그리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

그의 새로운 전쟁은 포탄이 아닌, 아이디어와 비전을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전장은, 런던 국립물리연구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