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E(Automatic Computing Engine) 프로젝트

372025년 08월 20일4

튜링은 국립물리연구소(NPL)의 자신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새로운 컴퓨터의 설계에 몰두했다. 그의 노트는 복잡한 회로도와 명령어 체계, 그리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들로 빠르게 채워져 나갔다.

1945년 말, 그는 마침내 상세 설계 보고서를 완성했다.
그가 제시한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설계안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것이었다.

  1. 고속 메모리:
    튜링은 당시 주류였던 윌리엄스관(음극선관) 방식의 메모리 대신, ‘수은 지연선 메모리(mercury delay line memory)’를 제안했다. 이는 수은이 채워진 긴 관의 한쪽 끝에서 음파(데이터)를 쏘면, 음파가 관을 통과하는 시간 동안 데이터를 저장했다가 반대편에서 다시 읽어 증폭시킨 뒤 되돌려 보내는 방식이었다. 튜링은 이 방식이 훨씬 더 빠르고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 최소 명령어 집합:
    폰 노이만이 설계에 참여한 미국의 EDVAC 컴퓨터는 복잡하고 다양한 명령어를 하드웨어에 내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튜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컴퓨터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명령어는 아주 적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덧셈, 뺄셈, 논리 연산 같은 최소한의 명령어만으로도, 이들을 조합하여 어떤 복잡한 작업(소프트웨어)이든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는 하드웨어를 단순화하고 유연성을 극대화하는, 시대를 앞서간 설계 철학이었다.

  3. 계층적 메모리 구조:
    튜링은 빠른 수은 지연선 메모리와 느리지만 용량이 큰 자기 드럼 메모리를 함께 사용하는 계층적 구조를 제안했다. 이는 오늘날 컴퓨터의 캐시-RAM-하드디스크 구조의 원시적인 형태와 같았다.

ACE의 설계안은 기술적으로 우아하고 효율적이었다. 튜링의 계산에 따르면, 완성된 ACE는 미국의 어떤 컴퓨터보다도 빠른 속도를 자랑할 터였다.

하지만 그의 비전은 기술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튜링은 이 기계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 기술했다.

“ACE의 활용 분야는 단순히 수학 문제 풀이에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계는 체스 게임을 학습하고, 경제 모델을 시뮬레이션하며, 심지어 영어 문장을 학습하고 번역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가 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해야 합니다.”

튜링은 자신이 설계한 기계가 단순히 계산만 하는 것을 넘어, 언젠가는 인간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 꿈꿨다.

그러나 NPL의 실행위원회는 그의 보고서를 받아 들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설계는 너무 야심 차고 복잡합니다. 수은 지연선 메모리 같은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쓰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우리에겐 당장 탄도 계산을 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기계가 필요합니다. 체스 두는 기계는 나중 이야기입니다.”

회의는 지지부진했다. 위원회는 튜링의 설계가 가진 혁신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규모에 압도당했다. 그들은 더 작고, 더 단순하며, 더 빨리 만들 수 있는 기계를 원했다.

튜링은 답답함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엔지니어들에게 자신의 설계를 설명하려 애썼지만, 이론가인 그의 설명은 실용적인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묵살되기 일쑤였다. 블레츨리 파크에서처럼, 그의 아이디어를 즉시 이해하고 현실로 만들어 줄 토미 플라워스 같은 엔지니어는 이곳에 없었다.

프로젝트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예산은 삭감되었고, 인력은 부족했다. 튜링은 자신의 비전이 관료주의와 기술적 보수주의라는 늪에 빠져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1947년, 좌절감과 무력감에 지친 튜링은 결국 NPL에 장기 휴가를 신청하고 케임브리지로 돌아가 버렸다. 그가 떠난 NPL에서는 그의 원대한 설계안을 대폭 축소시킨 ‘파일럿 ACE(Pilot ACE)’의 제작이 느릿느릿 진행되고 있었다.

튜링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죽지 않았다. 그의 설계 보고서는 비밀리에 복사되어, 맨체스터를 포함한 영국의 다른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런던에서의 전투는 패배했지만, 그의 비전이라는 씨앗은 이제 맨체스터라는 새로운 땅에서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튜링의 아이디어를 이해하고 실현시켜 줄 또 다른 공학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