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앨런 튜링은 맨체스터 대학의 수학과 부임 제안을 수락했다. NPL에서의 쓰라린 경험 이후, 그는 더 이상 컴퓨터 제작의 최전선에 서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를 맨체스터로 초빙한 옛 스승, 맥스 뉴먼과 함께 새로운 기계의 탄생을 지켜보는 역할을 맡았다.
맨체스터 대학의 분위기는 NPL과 전혀 달랐다. 그곳에는 프레더릭 윌리엄스와 톰 킬번이라는 두 명의 뛰어난 공학자가 있었다. 그들은 튜링의 ACE 설계안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독자적인 기술(윌리엄스-킬번관 메모리)을 이용해 세계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방식 컴퓨터, ‘맨체스터 마크 1(Manchester Mark 1)’의 프로토타입을 막 성공시킨 참이었다.
1948년 6월 21일, 그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베이비(Baby)’라 불린 프로토타입 컴퓨터가 메모리에 저장된 17줄짜리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실행한 것이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주어진 수의 가장 큰 약수를 찾는, 지극히 단순한 계산이었지만 그 의미는 엄청났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가 하드웨어에 고정된 명령이 아닌, 자신의 메모리에 저장된 프로그램을 스스로 읽고 실행한 것이다.
튜링은 이 순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자신이 12년 전 상상했던 ‘보편 기계’의 원리가, 마침내 현실의 기계 안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의 진짜 질문으로 돌아갈 도구가 생긴 셈이었다.
컴퓨터가 점차 현실화되자, 튜링은 자신의 오랜 질문으로 다시 회귀했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가 18살 때, 크리스토퍼의 죽음 앞에서 던졌던 막연하고 철학적인 질문.
이제 그 질문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Can machines think?)”
튜링은 맨체스터 대학의 동료들과 이 주제로 자주 논쟁을 벌였다. 철학 교수, 생물학 교수, 그리고 컴퓨터를 만드는 공학자들까지.
한 신경외과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튜링 박사, 그건 불가능합니다. 생각은 인간의 뇌, 이 살아있는 신경세포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고유한 현상입니다. 쇠붙이와 진공관 덩어리가 어떻게 의식을 갖겠습니까?”
튜링은 반박했다.
“교수님, 그 신경세포들은 결국 물리 법칙과 화학 법칙에 따라 작동하지 않습니까? 그 작동 원리를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할 수만 있다면, 그것과 진짜 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탄소 기반이고 다른 하나는 규소 기반이라는 재료의 차이뿐 아닙니까?”
또 다른 철학 교수가 끼어들었다.
“설령 기계가 인간처럼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을 ‘생각’이라고 부를 수는 없소. 기계는 기쁨이나 슬픔, 사랑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지 않소. 진정한 지능은 감정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오.”
튜링은 이 논쟁들이 끝없는 평행선을 달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의 근원은 ‘생각(think)’이나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단어 자체에 있었다. 이 단어들은 너무나 모호하고 주관적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의미로 이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튜링은 동료들에게 묻곤 했다.
결국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다. 그저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이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구나’라고 추론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의 문제를 끝없이 파고드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튜링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칠판 앞에 섰다.
그는 ‘Can machines think?’라는 문장을 큼지막하게 썼다. 그리고는 그 문장 전체에 가위표를 쳤다.
“이 질문은 너무 의미가 없다. 토론하기에 부적절하다.”
그는 생각했다.
정의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의를 내리는 대신, 테스트를 하면 되지 않을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다면, 그 둘은 기능적으로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의 머릿속에서, 수년간의 논쟁과 고민 끝에, 마침내 새로운 아이디어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의 본질을 묻는 대신, ‘생각하는 척’하는 능력을 시험하는, 지극히 실용적이고도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인공지능의 역사를 가를 가장 유명한 테스트의 서막이, 그렇게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