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대학의 철학 세미나실.
앨런 튜링은 초청 연사로 단상에 섰다. 청중은 철학자, 언어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그의 동료 수학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제는 ‘기계 지능’이었다.
튜링은 서두에서부터 논쟁의 핵심을 찔렀다.
“우리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생각’이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합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청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중, ‘생각’이란 무엇인지 명확하고 반박의 여지가 없게 정의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세미나실은 조용했다. 모두가 ‘생각’이 무엇인지 안다고 느꼈지만, 그것을 객관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한 철학 교수가 손을 들었다.
“생각이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능력, 즉 ‘의식(consciousness)’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튜링이 즉시 반문했다.
“훌륭한 지적입니다, 교수님.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제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교수님은 제 두개골 속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교수님 자신의 의식뿐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의 의식은, 그들의 행동과 말을 통해 추론할 뿐이지요. 이것을 철학에서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문제(Problem of other minds)’라고 부르더군요.”
그의 지적은 날카로왔다. 의식은 1인칭 시점의 주관적인 경험이다. 그것을 객관적인 3인칭 시점에서 측정하거나 증명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의식을 지능의 필수 조건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존재(사람이든 기계든)의 지능도 결코 증명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된다.
“이런 식의 독아론(solipsism)적 태도를 취한다면, 이 토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튜링이 덧붙였다.
이번에는 생물학 교수가 의견을 냈다.
“생각은 뇌라는 특정 생물학적 기관의 기능입니다. 살아있는 뉴런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전기화학적 현상이죠. 인공적인 기계가 그것을 흉내 낼 수는 없을 겁니다.”
튜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비행기를 생각해보시죠. 초기 비행 연구가들은 새의 날갯짓을 모방하려 애썼습니다. 깃털과 근육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했죠. 하지만 오늘날의 비행기는 날갯짓을 하지 않습니다. 양력이라는 공기역학의 ‘원리’를 이용할 뿐입니다. 생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는 뇌의 신경세포 하나하나를 모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능을 만들어내는 ‘정보 처리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다른 재료, 즉 전자회로로 구현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의 주장은 명료했다. 지능의 본질이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과 ‘구조’에 있다는 것.
논쟁은 계속되었다.
“기계는 독창성이 없다.”
“기계는 실수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
“기계는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튜링은 이 모든 반론들이 결국 ‘생각’이라는 단어에 대한 각자의 주관적인 정의에서 비롯됨을 간파했다. 이 논쟁은 과학적 토론이 아니라, 단어의 의미를 둘러싼 철학적 말싸움으로 흐를 뿐이었다. 이대로는 백 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을 터였다.
세미나가 끝나고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온 튜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 무의미한 소모전을 끝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생각’이라는 단어가 문제라면, 그 단어를 질문에서 아예 빼버리면 어떨까?
정의를 내리는 대신, 행동을 관찰하는 것.
내면의 상태를 추측하는 대신, 외부로 드러나는 결과물만으로 판단하는 것.
그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케임브리지 시절, 동료들과 함께 즐겼던 한 파티 게임. 남녀 한 쌍이 다른 방에 들어가 있고, 질문자가 쪽지로 질문을 던져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인지 맞추는 게임이었다. 그 게임에서는 오직 텍스트로 된 ‘답변’만이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목소리도, 외모도 알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다.
튜링은 칠판으로 다가가, 새로운 질문을 적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았다.
대신, 기계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인간인 척’ 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이 발상의 전환이, 인공지능 분야 전체의 방향을 결정짓게 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