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링은 무의미한 철학적 논쟁의 늪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았다. 그 열쇠는 ‘정의’가 아닌 ‘행동’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정리하기 위해, 펜을 들고 노트에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떠올린 파티 게임을 변형하여, 새로운 게임을 고안했다.
게임 1: 남녀 맞추기 게임
- 참가자: 3명. 심문자(C), 남자(A), 여자(B).
- 게임의 목표: 심문자 C는 A와 B 중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인지 알아맞혀야 한다.
- 규칙:
- 심문자 C는 다른 방에 있으며, A와 B를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 모든 소통은 타자기로만 이루어진다. C는 쪽지를 통해 A와 B에게 질문을 하고, A와 B는 타자로 친 답변을 돌려준다.
- 남자 A의 임무는 심문자 C를 속여서, 자신이 여자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 여자 B의 임무는 심문자 C를 도와서, “내가 여자이고, 저쪽이 남자다”라는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튜링은 이 게임의 본질을 분석했다. 심문자 C는 오직 텍스트로 된 응답만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A와 B의 외모, 목소리, 필체 등 모든 물리적 단서는 배제된다. 판단의 근거는 순수하게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 논리, 재치, 그리고 감성의 표현 방식뿐이다.
이제, 그는 이 게임에서 결정적인 한 가지를 바꾸기로 했다.
그의 펜이 다음 페이지에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적었다.
게임 2: 기계 맞추기 게임 (The Imitation Game)
- 참가자: 3명. 심문자(C), 인간(B), 그리고 컴퓨터(A).
- 게임의 목표: 심문자 C는 A와 B 중 누가 인간이고 누가 컴퓨터인지 알아맞혀야 한다.
튜링은 숨을 죽였다.
이것이었다.
그가 찾던 새로운 질문.
그는 노트 위에 새로운 질문을 힘주어 썼다.
“이 새로운 형태의 게임에서, 컴퓨터가 남자 A의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더 이상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기계가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잘 ‘모방’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생각’, ‘지능’, ‘의식’과 같은 모호하고 논쟁적인 단어들이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관찰 가능한 결과, 즉 심문자의 ‘판단 성공률’이라는 객관적인 척도뿐이었다.
만약 수많은 시도 끝에, 심문자가 컴퓨터와 인간을 구별해내는 확률이 그저 동전을 던지는 수준(50%)에 불과하다면?
다시 말해, 컴퓨터가 심문자를 성공적으로 속여서,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게 만든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 컴퓨터가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가 사라지는 것 아닐까?
튜링은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것은 완벽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내면의 상태를 증명하라는 불가능한 요구 대신,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의 동등함을 기준으로 삼는 것.
이것은 과학적인 실험이 가능한 질문이었다.
컴퓨터의 성능이 발전함에 따라, 심문자의 오판 확률을 통계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었다. 실험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게임, 튜링이 ‘이미테이션 게임(모방 게임)’이라고 부른 이 테스트는, 훗날 ‘튜링 테스트(Turing Test)’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것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진보를 측정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유명한 기준점이 되었다.
튜링은 자신이 찾아낸 새로운 길에 만족했다.
그는 이제 이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당대 최고의 철학 저널에 기고할 논문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 논문은 인공지능의 시대를 여는 선언문이 될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