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링은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반론이 가진 무게를 인정했다. 그것은 ‘기계는 우리가 명령한 것만 수행할 수 있다’는, 직관적으로 너무나도 타당해 보이는 주장이었다. 그는 이 강력한 요새를 정면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반격은, ‘독창성’의 기준 자체를 흔드는 것이었다.
“러브레이스 부인의 주장은, 기계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튜링은 노트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어떤 위대한 발견이나 예술 작품도, 완전히 무(無)에서 창조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아이디어는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아이디어들의 영향을 받고, 교육을 통해 주입된 원리들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예로 들었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기본적인 원리와 사실들을 가르친다. 이것은 일종의 ‘프로그래밍’ 과정이다. 하지만 뛰어난 학생은 배운 것을 바탕으로, 선생님조차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정리나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이때, 우리는 학생의 결과물이 ‘독창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선생님의 가르침이라는 ‘입력’ 없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학생의 뇌라는 ‘처리 장치’가, 선생님이 제공한 ‘데이터’와 ‘규칙’을 바탕으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낸 것뿐입니다.”
튜링의 논리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인간의 뇌 역시 정해진 물리 법칙과 화학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이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과 살면서 축적된 경험이라는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뇌라는 복잡한 기계가 수행하는 계산의 결과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과정이 너무나 복잡하여 우리 스스로 그 인과관계를 추적하지 못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인간의 창의성과 기계의 계산 과정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 차이가 있다면 오직 복잡성의 정도와 처리하는 데이터의 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러브레이스의 반론을 무너뜨릴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그것은 바로 그가 논문 전반에 걸쳐 강조해온 ‘학습하는 기계(Learning Machine)’의 개념이었다.
“러브레이스 부인이 관찰한 것은, 배비지의 해석 기관처럼 고정된 계산만 수행하는 기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 컴퓨터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기계에게 모든 정답을 일일이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하는 규칙’을 프로그래밍할 것입니다. 아이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듯, 기계에게 일반적인 원리와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를 개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계에 방대한 데이터를 경험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의 눈앞에는 미래의 기계가 그려지고 있었다.
이 학습하는 기계는, 제작자조차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식을 조합하고 새로운 패턴을 발견해낼 것이다. 그 결과물은 더 이상 최초 프로그래머의 의도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 자신의 ‘학습 경험’이 낳은 독창적인 산물이 될 터였다.
“그런 기계가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튜링은 러브레이스의 반론을 단순히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 반론을 기회로 삼아, 진정으로 지능적인 기계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 즉 ‘기계 학습’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러브레이스의 반론은 ‘기계는 시키는 일만 한다’고 말했다.
튜링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계에게 ‘스스로 배우라’고 명령하면 된다.”
그의 노트 위에서, 인공지능이 창의성을 가질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마침내 완성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