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가 작성한 제안서는 모질라 내부에서부터 파장을 일으켰다. 처음 그의 아이디어를 ‘위험하다’며 반대했던 크리스조차도, ‘표준’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는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웹의 파편화를 막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너무나도 정당했다.
모질라 재단은 블라디미르의 비전에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했다. 이제 그의 아이디어는 한 개인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모질라의 공식적인 제안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제안서를 들고 찾아갈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크로노스 그룹(Khronos Group).
그 이름은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했지만, 컴퓨터 그래픽과 멀티미디어 업계에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비영리 기술 컨소시엄이었다. 그들의 회의 테이블에는 애플, 구글, 인텔, 엔비디아, AMD, 소니, 삼성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거대 기업들의 대표들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명확했다. 특정 회사에 종속되지 않는, 개방된 표준 기술을 제정하고 발전시키는 것.
블라디미르가 그의 ‘Canvas 3D’의 기반으로 삼았던 OpenGL 역시 크로노스 그룹이 관리하는 대표적인 표준이었다. 모바일 기기를 위한 경량화 버전인 OpenGL ES, GPU를 이용한 병렬 컴퓨팅 표준인 OpenCL 등, 하드웨어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핵심 기술들의 명맥이 바로 이곳에서 결정되고 있었다.
그들은 기술 업계의 ‘신들의 회의’와도 같았다. 이 테이블에서 결정된 표준은 사실상 전 세계 모든 디바이스와 소프트웨어가 따라야 하는 법칙이 되었다.
2009년 초, 마침내 운명의 편지가 도착했다.
모질라의 이름으로 제출된 ‘웹 브라우저를 위한 하드웨어 가속 3D 그래픽스 표준 제안’이 크로노스 그룹의 공식 안건으로 채택된 것이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부키체비치는 모질라의 대표 자격으로, 다음 워킹 그룹 미팅에 참석하여 그의 아이디어를 직접 발표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심장이 뛰었다.
그는 이제 골방에서 홀로 코드를 짜던 무명의 개발자가 아니었다. 업계를 움직이는 거인들 앞에서 웹의 미래를 건 발표를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발표 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점검했다. 기술적인 세부 사항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지금 웹에 네이티브 3D 표준이 필요한가’에 대한 철학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의 발표 자료에는 구글의 O3D가 언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난이 아닌, 존중의 의미였다.
‘O3D의 등장은 시장의 강력한 요구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플러그인 방식은 웹의 개방성과 파편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웹의 본질에 더 가까운 길이 필요합니다.’
그는 O3D라는 강력한 대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어렵고 더딘 ‘표준화’의 길을 가야 하는지를 납득시켜야 했다.
발표 날짜가 다가왔다. 블라디미르는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의 노트북 가방 안에는 파란 사각형에서 시작해 외로운 삼각형을 거쳐 완성된 프로토타입과, 웹의 미래를 향한 그의 뜨거운 신념이 담긴 제안서가 들어 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지금, 기술의 신들이 사는 올림푸스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인간 세상의 불꽃, ‘Canvas 3D’라는 작은 가능성이 들려 있었다. 과연 신들은 그의 불꽃을 받아들여 줄 것인가. 모든 것은 그의 발표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