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U, 잠자는 그래픽의 거신(巨神).

3

발행일: 2025년 08월 04일

CPU가 답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 블라디미르의 시선은, 코드가 가득한 모니터 화면을 떠나 책상 아래에서 묵묵히 열기를 뿜어내는 컴퓨터 본체로 향했다. 그 안에는 웹의 세계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래픽 처리 장치(Graphics Processing Unit).

그것은 CPU와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였다. CPU가 모든 분야에 능통한 만능 지휘관이라면, GPU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특수부대였다. 바로 ‘그래픽 연산’이라는 임무.

그 내부에는 수백, 수천 개의 단순한 연산 코어(Core)가 벌집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 코어들은 복잡한 판단은 내리지 못했지만, 단순 반복 계산을 ‘동시에, 한꺼번에’ 처리하는 데에는 경이적인 속도를 자랑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수백만 개의 픽셀에 각각 다른 색 정보를 입히는 작업. 3D 모델을 구성하는 수만 개의 꼭짓점을 한 번에 움직이는 작업. CPU가 끙끙대며 하나씩 처리해야 할 일들을, GPU는 마치 수천 개의 손으로 동시에 그림을 그리듯 순식간에 해치웠다.

이미 세상은 GPU의 힘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화려한 3D 게임 속 세상,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정밀한 CAD 프로그램, 의사들이 들여다보는 3차원 인체 스캔 데이터까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모든 시각적 혁명 뒤에는 어김없이 GPU의 압도적인 연산 능력이 있었다.

문제는 이 강력한 거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법이었다. GPU는 자바스크립트 같은 고급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만의 언어, 즉 GPU를 직접 제어하기 위한 저수준(low-level)의 명령어 집합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OpenGL(Open Graphics Library)’이었다.

OpenGL은 특정 회사나 운영체제에 종속되지 않은, 공개된 표준 그래픽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였다. 개발자들은 OpenGL이 제공하는 명령어들을 통해 ‘이 좌표에 점을 찍어라’, ‘이 점들을 연결해 삼각형을 만들어라’, ‘이 삼각형을 빨간색으로 칠하라’와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GPU에 직접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해 보였다. 브라우저가 자바스크립트로 OpenGL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하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브라우저의 존재 이유와도 같은,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두 개의 대원칙.

첫 번째는 ‘보안’이었다.
웹브라우저의 제1원칙은 ‘절대 웹페이지가 컴퓨터의 핵심 자원에 직접 접근하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코드 조각에 불과한 웹페이지가 컴퓨터의 하드웨어를 직접 제어하는 순간, 재앙이 시작될 수 있었다.

악의적인 코드가 GPU를 장악해 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키거나, 그래픽 드라이버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개인 정보를 빼내 가는 끔찍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브라우저는 그런 위험을 막기 위해 웹페이지를 ‘샌드박스(Sandbox)’라는 안전한 격리 공간에 가두어 두었다. 그리고 GPU는 그 샌드박스의 까마득한 바깥에 있었다.

두 번째는 ‘표준화와 호환성’이었다.
웹은 어떤 운영체제, 어떤 컴퓨터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야 했다. 하지만 현실의 GPU 세계는 복잡했다. 제조사마다 드라이버가 달랐고, 같은 OpenGL이라도 버전에 따라, 혹은 드라이버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게 동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런 혼돈을 그대로 웹으로 가져올 수는 없었다.

블라디미르는 눈을 감았다. 상황이 명확해졌다.

GPU라는 잠자는 거신은 바로 저기,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하지만 브라우저라는 견고한 성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무작정 벽을 부수려다간 성 전체가 무너질 터였다.

‘다리가 아니라, 문이 필요해.’

그는 생각했다.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거신에게 안전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 모든 이가 똑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된, 단 하나의 문을 만들어야 했다.

그의 도전은 이제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 웹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과 씨름하는 거대한 과제가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