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소송이라는 외부의 폭풍이 진행되는 동안, 드미트리의 내부 세계에는 또 다른 종류의 파문이 일고 있었다. 그 시작은 구글의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Google I/O’의 준비 과정에서였다.
개발자 관계팀의 리아나는 드미트리에게 WebGPU의 최신 기술을 선보이는 세션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주제는 ‘메시 셰이더와 차세대 웹 렌더링’이었다.
“드미트리, 당신이 직접 무대에 서서, 개발자들에게 메시 셰이더의 비전을 보여주세요. 당신이야말로 이 이야기를 할 최고의 적임자입니다.”
드미트리는 당연히 수락했다. 하지만 발표 자료를 만들고 리허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리허설 룸. 드미트리는 텅 빈 객석을 향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메시 셰이더는 기존의 그래픽스 파이프라인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신입니다. CPU가 수행하던 컬링 작업을 GPU로 옮김으로써…”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설명은 명료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리아나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발표가 끝나자, 리아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드미트리, 발표 내용은 완벽해요. 기술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요.”
“어렵다고요?”
드미트리는 의아했다. 그는 최대한 쉬운 용어를 사용하며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리아나가 설명했다.
“당신은 ‘컬링’, ‘파이프라인’, ‘셰이더 스테이지’ 같은 용어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Google I/O의 청중은 당신이나 Dawn 팀 동료 같은 그래픽스 전문가들만이 아닙니다. 평범한 웹 개발자, 기획자, 심지어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발표는 마치 외국어처럼 들릴 겁니다.”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문제는 용어만이 아니에요. 당신의 설명 방식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시작되고 있어요. 당신은 지금 ‘기술을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청중이 ‘기술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리아나의 피드백은 드미트리에게 충격이었다.
그는 지난 10년간, 세계 최고의 그래픽스 엔지니어들과 함께 일해왔다. W3C의 회의, Dawn 팀의 미팅. 그가 속한 세상에서는 ‘메시 셰이더’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의미와 맥락이 통용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전문가들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듯했다. 기술이라는 상아탑에 갇혀, 바깥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잊어버린 전문가의 모습.
그날 밤, 드미트리는 자신의 발표 자료를 모두 지웠다. 그리고 백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는 기술적인 용어들을 모두 걷어냈다.
대신, 그는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그의 새로운 발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러분, 멋진 숲속 장면을 웹에서 만들고 싶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숲에는 수백만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에서는, 여러분의 컴퓨터 CPU가 이 수백만 그루의 나무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이 나무는 카메라에 보이나? 저 나무는 너무 멀리 있나?’라고 물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의 컴퓨터는 금방 지쳐버리겠죠.”
그는 화면에 지쳐 보이는 CPU 아이콘을 띄웠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방법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CPU에게 단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저기 숲이 있어!’ 라고요. 그러면 GPU라는 똑똑한 일꾼이 숲으로 달려가서, 알아서 카메라에 보이는 나무들만 골라 멋지게 그려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WebGPU가 가져올 미래입니다.”
그는 메시 셰이더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기술의 본질과 가능성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완벽하게 전달했다.
며칠 후, Google I/O의 실제 무대.
수천 명의 청중 앞에서, 드미트리는 자신의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의 발표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이 만들어낼 놀라운 미래에 열광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드미트리에게 리아나가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고의 발표였어요, 드미트리. 당신은 이제 훌륭한 엔지니어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스토리텔러이기도 하군요.”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또 하나의 중요한 성장을 이루었음을 깨달았다.
기술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그 기술의 가치를 세상에 전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더 이상 상아탑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기술의 세계와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어, 복잡한 지식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번역하는, 새로운 종류의 연금술사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