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 I/O의 성공적인 발표 이후, 드미트리는 자신의 새로운 역할에 점차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 그는 이제 기술의 깊이와 대중의 눈높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줄 아는 노련한 커뮤니케이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삶은 안정적인 항해를 계속하는 듯했다.
그 항해에 예상치 못한 안개가 드리워진 것은, 그의 멘토이자 구글의 저명한 그래픽스 연구원이었던 닥터 앨런의 갑작스러운 퇴사 소식 때문이었다.
닥터 앨런은 드미트리가 ANGLE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시절부터 그에게 수많은 기술적 영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거인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드미트리는 WebGPU라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퇴사를 앞둔 앨런은 드미트리를 자신의 연구실로 불렀다.
“자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이 있네, 드미트리.”
앨런은 낡은 서버 랙 하나를 가리켰다. 그 서버에는 ‘Project Chimera’라는 빛바랜 라벨이 붙어 있었다.
“키메라? 처음 들어보는 프로젝트인데요.”
드미트리가 물었다.
앨런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걸세. 세상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는 프로젝트니까. 이건… 구글의 실패한 유산일세.”
그는 키메라 프로젝트의 정체를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WebGPU가 탄생하기 10여 년 전, 구글이 극비리에 진행했던 프로젝트였다. 목표는 놀랍게도, ‘클라우드 서버에서 3D 그래픽을 렌더링하여, 그 결과를 동영상 스트림으로 사용자에게 전송하는’ 기술, 즉 지금의 클라우드 게이밍과 완벽하게 동일한 개념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지.”
앨런이 말했다.
“네트워크 속도는 끔찍하게 느렸고, 비디오 압축 기술은 조악했으며, 무엇보다 서버에서 GPU를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표준화된 방법이 없었네. 우리는 각기 다른 엔비디아와 AMD의 드라이버에 맞춰, 거의 해킹에 가까운 방식으로 코드를 짜야만 했지.”
프로젝트는 결국 기술적 한계와 막대한 비용 문제로 인해 조용히 폐기되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왜 이제 와서 이걸 제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드미트리가 물었다.
“자네가 시작한 ‘헤드리스 WebGPU’ 때문일세.”
앨런의 눈이 빛났다.
“자네는 지금, 우리가 10년 전에 실패했던 바로 그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고 있어. 우리는 서버에 맞는 비표준 기술을 만들려다 실패했지만, 자네는 웹 표준 기술을 서버로 확장시키고 있지. 접근법이 정반대야.”
그는 서버 랙을 톡톡 치며 말했다.
“이 안에는, 우리가 키메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겪었던 수많은 실패의 기록이 담겨 있네. 서버 환경에서 여러 사용자의 렌더링 작업을 어떻게 격리하고 스케줄링해야 하는지, 네트워크 지연 시간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수천 개의 GPU를 관리하며 겪었던 온갖 종류의 드라이버 버그들… 이 모든 것이 담겨있지.”
그것은 실패한 프로젝트의 잔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드미트리에게, 과거가 남겨준 가장 값진 보물 지도였다.
“나는 이제 떠나지만, 이 그림자의 유산을 자네에게 맡기고 싶네. 자네라면, 우리의 실패를 딛고 우리가 꿈꿨던 세상을 완성시킬 수 있을 걸세.”
앨런이 떠나고, 드미트리는 홀로 연구실에 남았다. 그는 키메라 프로젝트의 방대한 문서와 소스 코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지금의 그가 봐도 감탄할 만큼 혁신적인 아이디어들과, 동시에 뼈아픈 실수들이 가득했다. 그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10년 전의 엔지니어들이 겪었던 고뇌와 좌절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서 있는 이 땅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아니었음을.
수많은 선배들이 먼저 이 길을 걷다가 남긴, 보이지 않는 실패의 지층 위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그는 헤드리스 WebGPU 프로젝트의 설계 문서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키메라 프로젝트의 교훈들을 하나씩 반영하기 시작했다.
서버 환경에서의 자원 격리 모델을 강화하고, 네트워크 효율성을 고려한 새로운 데이터 전송 API를 구상했다.
그의 비전은 더 이상 막연한 상상이 아니었다. 과거의 실패라는 단단한 데이터 위에서, 훨씬 더 정교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며칠 후, 그는 ANGLE 프로젝트 회의에서 젊은 엔지니어들에게 키메라 프로젝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실패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길을 비춰주는 등대가 될 겁니다. 그러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는 이제 더 이상 혼자 걷고 있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는 과거의 그림자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날 새로운 세대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의 여정은 그렇게, 시간을 넘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