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 시뮬레이션 프로젝트의 성공은 드미트리에게 엄청난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구글 내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엔지니어 중 한 명이 되었고, 외부 기술 콘퍼런스의 기조연설자로 끊임없이 초청받았다. 언론은 그를 ‘웹 그래픽의 패러다임을 바꾼 선구자’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그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점점 더 깊은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은 WebGPU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항상 그의 이름과 구글, 애플, 모질라와 같은 거대 기업들만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위대한 여정의 이면에는, 이름도, 빛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수많은 ‘보이지 않는 영웅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 생각은 한 통의 내부 메일을 받고 더욱 깊어졌다.
메일은 크롬의 기술 문서(Technical Documentation) 팀 소속인 ‘클로이’라는 직원에게서 온 것이었다.
“드미트리 님, 안녕하세요. 저는 WebGPU의 공식 개발자 문서를 담당하고 있는 클로이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최근에 추가된 ‘타임라인 동기화’ 기능에 대한 문서를 작성하던 중,
GPUFence의 동작 방식에 대해 몇 가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드미트리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신이 예전에 작성했던 설계 문서를 다시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설계 문서는 그와 Dawn 팀 동료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기술 용어와 약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일반적인 개발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불친절했다.
그는 클로이와 직접 만나기로 했다.
사무실 한쪽의 작은 회의실에서 만난 클로이는, 평범하고 조용한 인상의 직원이었다. 그녀는 드미트리 같은 스타 엔지니어 앞에서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
“제가 너무 기초적인 걸 질문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드미트리는 손을 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닙니다, 클로이. 오히려 제가 사과해야 할 일입니다. 저희가 만든 설계 문서가 너무 불친절했군요. 궁금한 점이 있다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그날 오후, 드미트리는 클로이에게 GPUFence
의 내부 동작 원리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GPU 스케줄러가 어떻게 신호를 처리하고, 다른 작업들이 어떻게 그 신호를 기다리는지, 그리고 어떤 엣지 케이스들을 주의해야 하는지.
클로이는 그의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메모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집요하게 파고들며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이 initialValue
매개변수는 스레드 경쟁 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만약 signal()
이 호출된 직후에 GPUDevice
가 lost
상태가 되면, 대기 중인 wait()
호출은 어떻게 동작하게 되나요?”
그녀의 질문은 날카롭고 본질적이었다. 그녀는 기술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좋은 문서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 시간의 설명이 끝나고, 클로이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드미트리 님. 이제야 이 기능의 전체 그림이 명확하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개발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최고의 문서를 작성해 보겠습니다.”
며칠 후, 클로이가 작성한 새로운 개발자 문서가 공개되었다.
드미트리는 그 문서를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드미트리의 복잡한 설명을, 명료한 문장과 이해하기 쉬운 다이어그램, 그리고 실제적인 코드 예제로 완벽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그가 몇 시간을 설명해야 했던 내용을, 개발자들은 이제 단 5분 만에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순간, 드미트리는 깨달았다.
클로이야말로 이 생태계의 진정한 영웅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그녀처럼, 기술의 최전선에 서 있지는 않지만, 복잡한 지식을 대중의 언어로 번역하고, 개발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친절한 지도를 그려주는 사람들.
QA 팀에서 수천 번의 반복 테스트를 통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버그를 찾아내는 테스터.
W3C에서 복잡한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표준 문서의 오탈자를 수정하는 에디터.
깃허브 이슈 트래커에서 초보자들의 질문에 묵묵히 답변을 달아주는 커뮤니티의 기여자.
그들 모두가 WebGPU라는 거대한 교향곡을 완성시킨, 이름 없는 연주자들이었다.
그날 이후, 드미트리는 자신의 모든 외부 강연과 인터뷰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웹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을 알리는 데 집중했다.
그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들의 가치를 스스로가 먼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위대한 기술은 결코 한 명의 천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평범한 영웅들의 어깨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그는 이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