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유령, 현재의 위협
제11화
발행일: 2025년 05월 12일
에단의 악몽 같은 증언은 올리비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불안의 씨앗을 심었다. ‘사고가 아니었어.’ 사만다의 마지막 절규가 그녀의 뇌리에서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에단의 불안정한 상태를 염려하면서도, 그의 말이 단순한 망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섬뜩한 가능성을 떨쳐낼 수 없었다. 진실을 알아야 했다. 에단을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위해서.
올리비아는 자신의 연구실 보안 단말기 앞에 앉아, 권한을 우회하는 복잡한 코드를 입력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그녀가 파헤치려는 것은 3년 전 종결된, 평범한 교통사고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평범함’ 뒤에 감춰진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마침내 보안을 뚫고 사만다 리브스의 사고 기록 파일에 접근할 수 있었다. 공식 보고서는 간결했다. 과속 차량과의 충돌, 운전자 사망. 하지만 올리비아는 더 깊숙한 곳, 거의 삭제되거나 열람 불가 등급으로 분류된 부속 파일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사고 현장 주변 비정상 전자기 펄스 감지 보고 - 담당자: 불명, 처리 상태: 원인 미상/기록 보류]
사고 직전, 현장 인근의 민간 관측소에서 극히 짧지만 강력한, 설명할 수 없는 EMP가 감지되었다는 기록이었다. 당시에는 기기 오작동이나 자연 현상으로 잠정 결론 내려진 듯했지만, 너무나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다음 파일이었다.
[사고 현장 수거 미확인 금속 파편 분석 결과 - 분석 기관: MI6 기술분석팀, 결과: 분석 불가. 구성 성분 및 구조, 지구상 알려진 물질과 불일치. 추가 분석 후 보고서 폐기 명령.]
올리비아는 숨을 삼켰다. MI6? 단순 교통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미세 파편 분석을 왜 MI6가 담당했고, 왜 분석 불가 판정 후 기록을 폐기하려 했을까?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라니. 에단의 악몽, 인공적인 양자 요동, 그리고 이 기록들. 흩어져 있던 점들이 하나의 끔찍한 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에단은 다시 술에 의지하고 있었다. 사만다의 유품 상자가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는 텅 빈 눈으로 아내의 사진을 어루만지다, 문득 구겨진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다. 릴리가 보던 그 암호 같은 기호가 적힌 메모지였다.
그는 무심코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술기운에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도, 메모지의 특정 기호 배열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 그는 비틀거리며 연구실에서 가져온 데이터 출력물을 찾았다. 어젯밤 그의 센서가 포착했던, 그 인공적인 양자 요동의 파형 패턴.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순간, 에단의 온몸에서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메모지의 기호 패턴 일부와, 그가 감지한 양자 요동 신호의 푸리에 변환 스펙트럼 그래프 사이에…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유사성이 존재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마치 같은 언어의 다른 문장처럼, 근본적인 구조가 닮아 있었다.
“이럴 수가… 사만다, 당신… 대체 뭘 알고 있었던 거야?”
에단의 목소리는 공포와 경악으로 갈라져 나왔다. 아내가 남긴 암호는 단순한 메모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이제 막 감지하기 시작한 미지의 존재, 혹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일부였던 걸까? 그렇다면 그녀의 죽음은…
그의 혼란을 비웃기라도 하듯, 현관문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엘라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단에게 따뜻한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내밀었다.
“박사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셔서요. 잠시 쉬시는 게…”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눈빛에는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에단은 그녀의 완벽한 얼굴 뒤에서 차가운 이질감을 느꼈다. 그녀는 너무 완벽했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너무나 시기적절하게 나타났다.
엘라나는 잠시 뒤, 그녀의 숙소로 돌아 왔다.
그녀는 다시 한번 상관이 아닌 다른 존재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다. 상대는 레이셀. 같은 종족이지만, 인류에 대해 극단적인 적대감을 가진 존재였다. 엘라나의 통신 장치 화면에 레이셀의 차갑고 아름다운, 그러나 잔인함이 서린 얼굴이 떠올랐다.
<엘라나, 아직도 그 인간들을 두둔할 셈인가? 리브스 박사라는 자는 이미 경계선을 넘었어. 그의 딸이라는 아이도 마찬가지고. 저들의 ‘관측’ 능력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건 명백한 위협이야.> 레이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직은… 그들의 잠재력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라나는 애써 침착하게 답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에단의 고통과 릴리의 숨겨진 상처가 그녀의 냉정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지켜본다고? 기다리다 우리가 먼저 잡아먹힐 수도 있어. 저들은 바이러스야, 엘라나. 우주라는 유기체를 병들게 하는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나는 더 이상 에크릴 님의 미온적인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선제 타격’을 감행할 수밖에.>
레이셀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엘라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통신 장치를 내려다보며 깊은 갈등에 휩싸였다. 레이셀의 광기는 위험했지만, 그녀의 경고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인류의 잠재력은 정말로 우주의 균형을 깨뜨릴 괴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에단은 여전히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내의 메모지와 자신의 관측 데이터가 들려 있었다. 과거의 유령과 현재의 위협이 그의 눈앞에서 섬뜩하게 겹쳐 보였다. 그는 이제 거대한 음모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음모는 그의 가장 소중했던 사람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의 폭풍이 그의 삶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