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된 현실의 공포
제14화
발행일: 2025년 05월 15일
사이렌 소리가 밤의 정적을 찢었다. 푸른 경광등 불빛이 양자컴퓨팅 연구실 창문을 광란적으로 비추며, 릴리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를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담요에 웅크린 채, 바닥에 그어진 하얀 분필 선 안쪽에 남겨진 끔찍한 흔적에서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스승, 가브리엘 머서의 마지막 자리였다.
경찰과 대학 보안팀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의 조사는 곧 벽에 부딪혔다. 침입의 흔적은 전무했고, 사라진 것은 오직 머서 교수의 연구 자료뿐이었다. 단순 강도나 원한 관계의 살인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묘한 현장.
릴리는 멍한 상태로 질문에 답했지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오디세우스 프로젝트, 어머니의 메모, 거대한 눈… 그것은 미친 소녀의 망상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차가운 공포만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이것은 경고였다. 자신과 아버지를 향한.
그때, 검은 세단 여러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구동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것은 빅터 할로우와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지역 경찰에게 짧게 신분증을 제시하고는 현장을 완전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할로우의 등장은 상황의 무게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할로우는 릴리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나, 릴리 양?" 그의 눈빛에는 감정이 없었지만, 미세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릴리의 상태를 살피는 동시에, 현장 곳곳을 날카롭게 훑었다.
MI6의 특수 분석팀이 조용히 현장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과학수사 장비와는 다른, 미세 에너지 탐지기와 고차원 분광 분석기 같은 첨단 장비들을 사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요원이 할로우에게 다가와 작은 샘플 용기와 데이터 패드를 내밀었다.
"국장님, 이겁니다. 일반적인 생체 조직이나 혈흔 반응과는 다릅니다. 극미량이지만… 비정상적인 에너지 잔류 패턴과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세 입자가 검출되었습니다."
할로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예상했던 바였다. 그는 즉시 MI6 내부에 극비 경계령, 코드명 ‘카산드라 경보’를 발동시켰다. 이것은 더 이상 추측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재하는 위협, 그것도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에 의한 공격이었다.
“리브스 박사와 올리비아 첸 박사를 즉시 확보해. 세 사람 모두 제1급 안전가옥으로 이동시킨다. 지금 당장.” 할로우의 명령은 단호했다.
에단과 올리비아는 연구소에서 거의 반강제로 끌려 나오다시피 했다. 에단은 머서 교수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한 상태였고, 올리비아는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도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차량에 태워져 삼엄한 경호 속에 런던 외곽의 비밀스러운 장소로 향했다.
차량이 이동하는 동안, 할로우의 암호화된 위성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할로우 국장, 알렉산더 코바치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낮고 부드러운, 하지만 강한 억양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러시아 출신의 억만장자, 첨단 기술 기업의 회장. 그의 이름은 권력과 부, 그리고 수많은 어두운 소문의 대명사였다.
“코바치 회장님, 이런 상황에 연락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할로우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머서 교수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코바치의 목소리에는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애도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 “듣자 하니 리브스 박사 일행의 신변이 안전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저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바치는 자신의 최첨단 보안 시설과 막대한 자금을 ‘인류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연구’에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에단의 이론과 릴리의 능력이 인류를 다음 단계로 이끌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치켜세우며, 안전하고 완벽한 연구 환경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할로우는 코바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고민했다. 그의 진짜 속셈은 불분명했지만, 지금처럼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그의 자금과 기술력은 분명 매력적인 카드였다. “…회장님의 제안은 감사히 검토하겠습니다.” 할로우는 일단 원론적으로 답했다.
먼 곳에서, 엘라나는 머서 교수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레이셀. 그녀의 잔혹하고 무분별한 행동은 엘라나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무고한 인간을, 그것도 릴리에게 소중했던 스승을 그렇게 무참히 살해하다니. 분노와 함께 인간적인 연민이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그녀는 즉시 에크릴에게 레이셀의 독단적인 행동을 보고했다.
“에크릴 님, 레이셀이 선을 넘었습니다. 그녀의 방식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오히려 인간들의 잠재력을 위험한 방향으로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특히 릴리 리브스를 보호해야 합니다.”
에크릴의 의식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파동에는 이전보다 복잡한 기류가 느껴졌다.
<레이셀의 행동은 유감이다. 하지만 엘라나, 너의 감정적인 동요 또한 우려스럽군. 인간에게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일단 상황을 주시하라. 직접적인 개입은 아직 시기상조다.>
엘라나는 에크릴의 미온적인 태도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더 이상 항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에단과 릴리에게 다가올 더 큰 위협을 예감하며,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 사이에서 깊은 고뇌에 빠졌다.
런던 외곽의 스산한 안전가옥. 창문 하나 없는 답답한 방 안에 도착한 에단, 릴리, 올리비아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측정된 현실의 공포가 그들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스승을 잃은 릴리의 눈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차가운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들 앞에는 코바치의 위험한 제안과 미지의 위협만이 어둡게 도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