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거품 속 비명
제15화
발행일: 2025년 05월 16일
런던 외곽, MI6가 운영하는 제1급 안전가옥.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은 마치 잘 꾸며진 무덤 같았다. 최첨단 보안 장비가 내뿜는 희미한 백색 소음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고, 벽에 걸린 추상화는 이질적인 평온함을 강요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평온하지 않았다.
릴리는 방 한구석 소파에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가브리엘 머서 교수의 마지막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스승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선, 날카로운 죄책감으로 그녀의 심장을 도려내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자신의 위험한 호기심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생각.
에단은 딸의 고통스러운 침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릴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목구멍에 걸린 돌덩이 같은 죄책감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이론, 자신의 집착이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
“내 탓이야… 모든게…” 릴리가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야, 릴리. 절대 네 탓이 아니야.” 에단은 딸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우리가 함께 밝혀내야 해. 교수님의 죽음, 그리고… 네 엄마의 죽음까지도.”
릴리는 아버지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는 슬픔과 함께, 차갑고 단단한 분노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3년 만에, 부녀는 비로소 서로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깨진 거울의 조각들이 위태롭게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요, 아빠. 알아내야 해요.” 릴리는 눈물을 닦으며 결연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노트북을 펼쳤다. “이대로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단서가 있을 거예요. 교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우리가 분석하던 데이터에…”
릴리는 아버지의 양자 감응 센서가 포착했던 그 ‘인공적인 양자 요동’ 데이터와, 자신이 오디세우스 프로젝트 로그에서 발견한 정보를 결합하여 분석하기 시작했다. 에단은 딸의 옆에 앉아 그녀의 작업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릴리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현란하게 춤을 추었고, 그녀의 눈빛은 천재적인 집중력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가 숨을 삼키며 화면의 특정 부분을 가리켰다.
“이 패턴… 아빠, 이것 좀 보세요.” 화면에는 복잡한 파형 그래프가 나타나 있었다. “아버지 센서가 잡은 요동 패턴과 오디세우스 탐사선이 마지막으로 감지했던 에너지 방출 패턴을 중첩 분석했더니… 이건 단순한 신호가 아니에요. 마치… 지성을 가진 존재들 사이의 고도로 암호화된 통신망 같아요. 엄청나게 방대하고 복잡한 네트워크…”
에단은 화면에 나타난 분석 결과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의 이론이 가리키던 존재는 하나가 아니었다. 어쩌면… 문명, 혹은 그 이상의 거대한 집단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하필 지금, 그들의 통신이 인류의 센서에 포착되기 시작한 걸까?
다른 방에서 올리비아는 MI6 요원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할로우 국장의 움직임과 요원들 사이에서 오가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특히 머서 교수의 죽음 이후 강화된 경계 태세와 알 수 없는 외부 세력의 개입 가능성은 그녀를 잠 못 들게 했다.
그녀는 제한된 접근 권한 속에서도 외부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보안 등급이 높은 내부 통신 기록에서 우연히 '알렉산더 코바치'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러시아 억만장자, 그리고 과거 논란이 많았던 극단적인 기술 연구의 후원자. 왜 MI6가 이 시점에 그와 접촉했을까? 할로우는 왜 그의 이름을 언급했을까?
의심의 씨앗이 싹트자, 올리비아는 허가된 개인 단말기를 이용해 코바치의 배경을 은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견한 정보들은 충격적이었다. 과거 불법적인 유전자 편집 및 인공지능 연구 자금 지원 의혹, '인류 진화'에 대한 그의 극단적인 견해들.
“이 남자… 위험해.” 올리비아는 조사 결과를 보며 중얼거렸다. 코바치가 이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다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어떻게든 에단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MI6의 감시 속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런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고급 호텔 스위트룸. 엘라나는 창밖을 응시하며 에크릴과 교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MI6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하면서도, 에단과 릴리 주변의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보고는 이전보다 더욱 긴급하고 단호했다.
“에크릴 님, 릴리 리브스의 능력이 다시 한번 진화했습니다. 그녀는 이제 단순히 현실을 ‘관측’하는 것을 넘어, 우주의 근본적인 정보 구조, 즉 ‘코드’를 읽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의식은 우리의 양자 프레임워크에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엘라나는 릴리가 아버지의 데이터와 자신의 해킹 정보를 결합하여 외계 통신 네트워크의 존재를 추론해낸 사실을 보고했다.
“레이셀의 방식은 틀렸습니다. 그녀의 공격은 오히려 릴리의 잠재력을 각성시키고,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을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저 아이와 소통해야 합니다. 안내해야 합니다.” 엘라나의 목소리에는 간절함마저 묻어났다.
에크릴의 의식은 여전히 침묵했지만, 그 침묵 속에는 이전과는 다른, 심오한 고려의 파동이 느껴졌다. 엘라나의 보고는 관리자들에게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인간의 의식이 단순히 현실을 렌더링하는 것을 넘어, 우주의 코드를 읽고 상호작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주 질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혁명이자, 예측 불가능한 재앙의 시작일 수도 있었다.
안전가옥의 밀폐된 공기 속에서, 그리고 외부의 감시 속에서, 서로 다른 의도와 불안감이 교차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에단과 릴리는 비극적인 화해 속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잡았지만, 그들을 노리는 보이지 않는 위협과 코바치라는 위험한 유혹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주의 관리자들은 마침내 인류라는 변수의 진정한 무게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