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속삭임
제16화
발행일: 2025년 05월 17일
MI6 안전가옥의 공기는 숨 막힐 듯 무겁고 탁했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기계음과 감시자들의 발소리만이 유령처럼 떠도는 밀실. 에단, 릴리, 그리고 올리비아는 각자의 불안과 슬픔 속에서 위태로운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올리비아였다. 그녀는 밤새 확보하고 분석한 자료를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에단, 릴리… 이걸 봐야 해요.”
화면에는 3년 전 사만다 리브스의 사고 현장 보고서 중, 공식 기록에서 누락되거나 의도적으로 폐기된 것으로 보이는 데이터들이 떠올랐다. 사고 직전 현장 인근에서 감지된 강력한 EMP 발생 기록. 그리고… 현장에서 수거되었으나 ‘분석 불가’ 판정을 받고 MI6 기술분석팀이 폐기를 명령했던 ‘정체불명의 미세 금속 파편’에 대한 보고서였다.
“EMP…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금속…”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었어요. MI6는 뭔가를 알고 있었거나, 최소한 은폐하려고 했던 거예요.”
에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머릿속에서 악몽 속 사만다의 절규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어! 당신이 볼수록 그들이 가까워져!’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연구, 그리고 미지의 존재가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주먹을 너무 세게 쥐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릴리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슬픔은 이미 마른 지 오래였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에 대한 분노가 그녀의 심장을 얼음처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분노는 그녀 안의 무언가를 깨우는 듯했다.
바로 그때, 안전가옥의 보안 통신 채널로 외부 접속 요청이 들어왔다. 발신자는 ‘엘라나 박사’.
빅터 할로우는 잠시 망설였다. 저 여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 요소였다. 하지만 머서 교수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외계 물질의 증거와,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했을 때, 그녀가 가진 정보는 무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유일한 돌파구가 될 수도 있었다.
“접속 허가한다.” 할로우는 짧게 명령했다. “단, 모든 통신과 행동은 최고 등급으로 감시하고 기록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발견되면 즉시 차단한다.”
잠시 후, 안전가옥의 강화된 문이 열리고 엘라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머서 교수의 죽음에 대해 형식적인 애도를 표하며, 자신의 전문 지식이 이 비극적인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의 완벽한 외모와 침착한 태도는 이 절망적인 공간에 더욱 섬뜩한 이질감을 더했다.
엘라나는 곧장 올리비아가 제시한 사만다 사고 기록에 주목했다. 그녀는 화면에 떠 있는 EMP 파형 패턴과 금속 파편 분석 데이터를 잠시 응시하더니, 마치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에너지 시그니처와 물질 구성은… 기존에 알려진 어떤 지구 기술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화면에서 에단과 올리비아를 향했다. “오히려… 극도로 진보된, 비지구적 기원의 기술에서 발견되는 특정 패턴과 매우 높은 수준의 유사성을 보입니다.”
‘비지구적 기원’. 그 단어는 안전가옥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엘라나는 마치 학술적인 분석 결과를 발표하듯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폭탄선언과 같았다.
에단과 올리비아는 숨을 삼켰다. 그들이 막연하게 추측하고 두려워했던 ‘외계 존재’의 가능성이, 눈앞의 이 불가사의한 여인의 입을 통해 구체적인 단서로 제시된 것이다. 특히 에단에게는 아내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충격적인 정보였다.
“비지구적… 기원이라고요?” 올리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과학자로서의 지적 충격과 동시에, 엘라나의 정체에 대한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은 걸까?
엘라나는 대답 대신, 마치 공기 중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시설 주변에서 미세한 에너지 교란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배경 노이즈 수준을 넘어서는, 명백히 인공적인 간섭입니다. 단순한 감시 장비 수준이 아닙니다. 훨씬 정교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외부의 지향성 교란 시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의 구체적인 경고와 전문적인 용어 사용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그녀는 위협의 실체와 그 기술적 수준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엘라나의 말은 안전가옥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할로우는 엘라나의 분석과 자체 감지 시스템의 미약한 이상 신호를 교차 확인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엘라나의 정보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듯 차갑게 빛났다. 안전가옥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외부의 위협은 실재했고, 내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협력자(?)가 있었다.
“리브스 박사, 릴리 양.” 할로우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낮고 강압적으로 변했다. 엘라나를 향한 경계심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상황의 긴박함을 강조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아는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제 당신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그때, 할로우의 암호화된 위성 전화가 다시 울렸다. 발신자는 알렉산더 코바치였다.
“할로우 국장, 걱정스러운 소식이 들려 다시 연락했습니다.” 코바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듣기로는… MI6의 안전가옥마저도 완벽한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리브스 박사 일행의 안전과 연구의 연속성을 위해서라도, 저의 제안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의 사설 연구 시설은 그 어떤 외부 위협으로부터도 완벽하게 보호될 수 있습니다.”
코바치의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 엘라나가 방금 확인시켜 준 외부 위협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위험천만한 코바치의 제안을 거부하기 어려운,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에단과 릴리, 그리고 올리비아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MI6의 불안정한 보호 아래 남을 것인가, 아니면 속내를 알 수 없는 억만장자의 강철 새장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절망적인 선택의 기로에 선 그들의 등 뒤로, 보이지 않는 감시자들의 시선과 다가오는 위협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엘라나의 등장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동시에, 그들이 가진 정보의 무게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