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새장 속으로
제18화
발행일: 2025년 05월 19일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킨 밤. 귀청을 찢는 로터 소리와 함께 육중한 군용 헬기가 MI6 안전가옥의 비밀 헬리패드에서 이륙했다. 창밖으로는 런던의 불빛이 빠르게 멀어져 갔고, 칠흑 같은 어둠만이 그들을 감쌌다. 헬기 내부에는 에단, 릴리, 올리비아, 엘라나, 그리고 빅터 할로우와 중무장한 그의 MI6 정예 요원 몇 명이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목적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코바치만이 아는 곳이었다.
몇 시간을 날았을까. 헬기는 망망대해 위,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듯한 작은 인공 섬에 착륙했다. 바닷바람은 차갑고 비릿했으며, 파도 소리만이 적막을 갈랐다. 섬 중앙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만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입구는 마치 요새의 성문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일행이 헬기에서 내리자, 육중한 강철 문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열리며 지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통로를 드러냈다. 통로 양옆으로는 검은색 특수 전투복을 입은 사내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감정 없는 눈빛으로 일행을 훑어보았고, 손에는 최신형 자동소총이 들려 있었다. 코바치의 사설 보안팀이었다. 그들 앞에는 유난히 덩치가 크고 냉혹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삭발한 머리에 깊게 팬 흉터가 있는 얼굴. 그의 이름은 이고르. 코바치의 충견이자, 그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집행자였다. 이고르의 눈빛은 맹수처럼 차갑고 잔인했다.
엘리베이터는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듯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곳은 지하 감옥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고급 호텔 로비나 미래적인 연구 단지를 방불케 했다. 눈부시게 밝은 인공조명 아래, 세련된 디자인의 복도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곳곳에는 값비싼 예술품과 첨단 디스플레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공기는 완벽하게 정화되어 상쾌했지만, 동시에 인공적인 향기가 섞여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명백한 위화감이 존재했다. 창문은 단 하나도 없었고, 복도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렌즈가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완벽한 통제와 감시. 이곳은 호화로운 감옥, 강철로 만들어진 새장이었다.
“리브스 박사님, 그리고 귀한 손님 여러분. 제 누추한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복도 끝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렉산더 코바치가 팔을 벌린 채 웃으며 다가왔다. 값비싼 실크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는 매력적인 미소와 신사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 깊은 곳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차가운 계산과 소유욕이 번뜩이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편히 쉬실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코바치는 일행을 안내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는 에단을 최첨단 장비로 가득 찬 거대한 실험실로 안내했다. 에단이 꿈꿔왔지만 예산 부족으로 포기해야 했던 모든 장비, 심지어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프로토타입 기기까지 갖춰져 있었다. “이곳에서 박사님의 위대한 연구를 마음껏 펼치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코바치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 눈빛은 에단의 능력을 탐욕스럽게 평가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그는 릴리를 거대한 원형의 방으로 이끌었다. 방 중앙에는 세계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양자컴퓨터가 푸른 빛을 발하며 가동되고 있었다. “릴리 양, 당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펼칠 무대입니다. 이 ‘세계를 계산하는 기계’로 우주의 비밀을 풀어보시지요.”
에단과 릴리는 눈앞의 압도적인 자원에 잠시 넋을 잃었지만, 동시에 코바치의 속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노골적인 불신감을 드러내며 주변을 살폈고, 할로우는 MI6 요원들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리며 경계를 강화했다. 엘라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부디 내 집처럼 편안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코바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한 배를 탄 동료니까요.”
그의 말을 끝으로, 일행이 들어왔던 엘리베이터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육중한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는 마치 감옥 문이 잠기는 소리처럼 그들의 귓가에 울렸다.
강철 새장 속에서의 위험한 거래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과연 약속된 지원일까, 아니면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일까. 어둠 속에서 코바치의 차가운 눈빛만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