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의 그림자
제2화
발행일: 2025년 05월 03일
유럽 우주국 천문 연구소. 최첨단 장비들이 내뿜는 희미한 기계음과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곳. 이곳의 질서정연함은 어젯밤 술에 절어 악몽에 시달렸던 에단 리브스의 내면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며칠 밤을 샌 사람처럼 퀭한 눈으로 자신의 발표 자료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양자 관측 이론’.
그것이 그의 모든 것을 건 가설의 이름이었다. 우주는 우리가 관측하기 전까지는 확정되지 않은 확률의 파동 상태로 존재하며, 지적인 관측 행위 자체가 우주의 물리적 실체를 ‘렌더링’한다는, 동료들 사이에서는 거의 정신 나간 소리로 치부되는 급진적인 이론. 하지만 에단에게는 그것이 진실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기이한 경험, 사만다의 죽음 뒤에 숨겨진 무언가에 대한 직감, 그리고 최근 포착된 설명 불가능한 우주 신호까지. 모든 것이 그의 이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리브스 박사, 아직도 그 ‘유령 우주’ 타령인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동료 연구원 몇몇이 그의 발표 자료를 훑어보며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에단은 굳은 얼굴로 그들을 외면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오늘 발표만 끝나면 자네 연구 예산은 먼지처럼 사라질 줄 알게, 에단.”
마커스 설리반 소장이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구소의 실권을 쥔 그는 에단의 이론을 비과학적인 망상이라 폄하하면서도, 가끔 그가 내놓는 관측 데이터의 정확성만큼은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설리반의 경고는 단순한 압박이 아니었다. 그의 학문적 생명을 끊어버릴 수도 있는 최종 통첩과 같았다.
“결과로 증명하겠습니다, 소장님.” 에단은 간신히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단.”
부드러운 목소리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올리비아 첸. 그의 동료이자, 그 이상의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지지자였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는 에단의 이론에 대한 흥미와 동시에 그의 불안정한 상태에 대한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요. 당신 이론은 혁신적이지만, 사람들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거에요.” 그녀의 따뜻한 손이 잠시 에단의 팔 위에 머물렀다. 그 작은 접촉이 잠시나마 그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괜찮아, 올리비아. 오늘은… 다를 거야.”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발표장에 선 에단의 손은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수많은 동료와 상급자들이 회의적인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거대한 스크린에 그의 이론 제목이 떠올랐다.
‘양자 관측 이론: 우주는 당신이 볼 때만 존재한다.’
에단은 마이크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첫 문장을 내뱉으려는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심장이 통제 불능 상태로 날뛰기 시작했고, 시야가 흐릿해지며 눈앞의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중의 표정은 의아함에서 점차 조롱과 짜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저것 봐, 또 시작이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속삭이는 소리들이 비수처럼 그의 귀에 꽂혔다. 설리반 소장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휘청거렸다. 발표는 시작도 하기 전에 처참하게 망가졌다.
에단은 거의 도망치듯 발표장을 뛰쳐나왔다. 등 뒤로 쏟아지는 동료들의 수군거림과 설리반 소장의 깊은 한숨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는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문을 잠그고, 그는 곧장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위스키 병을 꺼내 병째로 들이켰다. 타는 듯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 위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연구실 한쪽 벽면에는 우주의 심연을 담은 거대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은하와 성운이 뒤섞인 장엄한 풍경. 하지만 지금 에단의 눈에는 그저 공허하고 차가운 확률의 그림자만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술기운이 머리를 마비시키기 시작하자, 그는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다.
“보고 있어… 당신들이 나를 보고 있어….”
누구를 향한 말인지 모를 섬뜩한 독백과 함께, 그는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둠이 그의 연구실을, 그리고 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