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 그리고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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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5월 24일

차가운 밤바람이 릴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절벽 아래에서는 검푸른 파도가 포효하며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날려 보낸 소형 스텔스 드론은 어둠 속으로 빠르게 녹아들며, 어머니의 유령 같은 신호가 발신되는 해안가를 향해 날아갔다. 릴리는 드론의 원격 카메라가 보내오는 희미한 영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죽였다.

‘조금만 더… 엄마…’

드론이 신호 발신 지점에 가까워지는 순간, 갑자기 통제실의 모든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로 뒤덮였다. 에단과 올리비아, 그리고 할로우는 비명을 지르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모든 통신과 센서가 먹통이 되어버렸다.

“함정이다!” 에단이 절규했다.

바로 그때, 릴리가 서 있던 절벽 위, 그녀의 등 뒤 어둠 속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인간의 기술로는 보이지 않는, 비틀린 빛과 함께 그림자보다 더 짙은 형체가 나타났다. 레이셀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잔인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손에는 기이한 형태의 외계 장치가 들려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 계집.” 레이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릴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릴리는 본능적인 공포에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레이셀이 손에 든 장치에서 쏘아진 보이지 않는 에너지 파동이 그녀의 신경계를 마비시킨 것이다.

“크… 윽!” 릴리는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네 어미처럼 말이지. 너무 많은 것을 보려 했어.” 레이셀은 천천히 릴리에게 다가오며 속삭였다. 그녀의 눈빛은 먹잇감을 앞에 둔 뱀처럼 차갑고 잔혹했다.

하지만 레이셀이 릴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려는 순간, 또 다른 섬광과 함께 엘라나가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냉정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분노와 결연함이 뒤섞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강렬한 기세였다.

“거기까지, 레이셀!” 엘라나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엘라나? 네가 감히 날 막아서?” 레이셀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 배신자! 저 하등한 유기체들에게 감화되기라도 한 건가?”

“이 아이는 건드리지 마.” 엘라나는 레이셀을 노려보며 자세를 낮췄다. 그녀의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푸른빛의 에너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 연구원 행세를 할 필요가 없었다.

두 외계 존재의 격돌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빨랐고, 주먹과 발길이 부딪힐 때마다 공기를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강력한 에너지 충격파가 발생했다. 절벽의 바위들이 부서져 나가고, 주변 공간이 불안정하게 뒤틀리는 듯했다.

이 소란을 감지한 코바치의 보안팀, 이고르가 이끄는 중무장한 용병들이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이상했다. 그들은 엘라나와 레이셀의 싸움을 적극적으로 제지하거나 릴리를 보호하려 하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마치… 전투 데이터를 수집하거나,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처럼. 이고르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코바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계 같은 냉혹함만이 서려 있었다.

“크윽!” 엘라나는 레이셀의 예상보다 강력한 공격에 잠시 비틀거렸다. 레이셀은 엘라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릴리에게 다시 한번 정신 공격을 가했다. 어머니의 죽음, 스승의 죽음,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죄책감이 릴리의 의식을 헤집었다.

“안 돼… 안 돼!” 릴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불안정한 양자 능력이 폭주하듯 주변의 확률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절벽의 일부가 예고 없이 무너져 내리고, 허공에서 기이한 빛의 입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바로 그 혼란의 순간이었다.

레이셀은 릴리의 폭주하는 에너지를 역이용했다. 그녀는 릴리의 불안정한 양자 파동과 자신의 외계 기술을 결합하여, 일시적인 차원 균열을 강제로 열었다. 비명처럼 일그러진 공간의 틈새가 릴리의 바로 뒤에 나타났다.

“이제 끝이다, 작은 벌레야.” 레이셀은 릴리의 몸을 빛나는 올가미처럼 보이는 특수한 에너지 구속 장치로 단단히 옭아맨 뒤, 그대로 차원 균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릴리!!!”

엘라나가 절규하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릴리의 모습은 비명과 함께 뒤틀린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고, 차원 균열은 섬광과 함께 순식간에 닫혀 버렸다. 레이셀 역시 그 틈을 이용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장에는 부서진 바위 조각과 엘라나의 절망적인 외침, 그리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코바치 용병들의 차가운 침묵만이 남았다.

통제실에서 이 모든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던 에단은 무너져 내렸다. 딸의 이름만을 부르짖으며, 그는 미친 사람처럼 통제실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다시 한번, 이번에는 돌이킬 수 없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납치. 그의 딸이, 눈앞에서 정체 모를 존재에게 끌려가 버렸다. 코바치의 강철 새장 안에서, 그의 눈앞에서. 절망과 분노, 그리고 코바치를 향한 살의가 그의 온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